스토리로 만나는 경북문화재…경주 양동마을 송첨종택

도심에 있다 보면 문뜩 시골 경치가 주는 포근함을 느껴보고 싶어진다.코로나19로 답답한 생활의 연속인 요즘 같은 날이면 더더욱 그렇다.매년 이맘때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울긋불긋한 단풍을 보며 한가로이 자연의 향기를 느끼는 시간을 갖지만 올해는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 해 반쪽짜리 가을이 됐다.그래도 가을이 주는 편안함을 느끼고자 천년수도 경주를 선택했다.경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옛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인 ‘양동마을’을 찾았다.예로부터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여주) 이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2010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에는 수많은 고택이 즐비하다.그 중에서도 ‘송첨종택’을 방문했다.‘경주 손씨’의 대종가인 송첨종택은 조선시대 전기의 옛 살림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이곳은 대종가들의 명맥을 잇는 가장 오래된 주택으로 꼽히며,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전통 가옥이다.송첨종택은 종가다운 규모와 격식을 갖추고 있어 건물을 지은 수법과 배치 방법들이 독특해 건축 문화재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높다.이곳은 양동마을의 입향조(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인 ‘양민공 손소’가 1459년(세조 5년) 건축한 집으로, ‘월성손씨종택’ 또는 ‘서백당’이라고도 한다.특히 손소의 아들인 손중돈 선생(조선전기 이조판서, 대사헌,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과 외손인 이언적 선생(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그의 주리적 성리설이 퇴계 이황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중요한 성리설이 됨)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양동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한 송첨종택은 현재까지 경주 손씨의 후손들이 거주하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양동마을의 가장 오래된 곳, 세 현인을 기다리다양동마을에 처음 들어 온 양민공 손소는 마을 내 처가에서 살다가 ‘송첨종택’을 짓고 분가했다.손소는 경북 청송 출신으로 ‘풍덕 류씨’ 류덕하의 사위로 경주 양동에 정착했다.조선시대 전기에는 혼인을 계기로 처가로 이주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었다.양동마을의 역사 해설사들에 따르면 이 당시 재산 상속의 구조가 ‘장남’ 중심이 아닌 형제‧자매에게 모두 배분되는 형식이라 처가에 얹혀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임진왜란 전까지는 균등상속을 원칙으로 하고 임진왜란 후부터는 맏이 중심의 상속제도가 강화되는 사회 현상이 두드러졌다는 것.전쟁이나 질병 등이 창궐하게 되면 이로 인한 사회적 변화가 도드라지기 때문이다.양동마을 사람들은 송첨종택 터가 ‘설창산’의 지맥이 응집된 지역 최고의 명당으로 여겨 왔다.송첨종택은 삼현지지(세 명의 현인이 출생한다)라 해서 세 분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속설이 전해지는 곳이다.두 현인(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은 이미 태어났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세 번째 현인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특히 손소의 딸이 친정에 와서 낳은 아들인 ‘이언적’은 종묘와 문묘에 함께 배향된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라 불린다.동방오현(조선시대 성리학을 이끈 유학자로서 이언적, 이황,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의 한 사람으로서 후대의 추앙을 받고 있다.마을사람들의 속설에 의하면 세 번째 현인을 만들고자 ‘경주 손씨’ 중 시집을 간 후손들이 송첨종택에서 아들을 낳기 위해 그렇게 양동마을을 되찾아왔다고 한다.임신을 하고도 아닌 척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친정에서는 마을 밖 초가를 내어 딸을 재웠다고 한다.◆서백당과 향나무, 송첨삼보서백당은 양민공 손소 종택의 당호(성명 대신에 그 사람이 머무는 거처의 이름으로 인명을 대신해 부르는 호칭)다.송첨종택의 사랑채에 걸린 현판인 ‘서백당’의 의미는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쓰며 인내를 기른다’는 뜻이다.송첨은 양민공의 호이다.서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전통 건축물 중 하나다.사랑채는 큰 사랑방 대청 건너편에 작은 사랑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서백당은 작은 사랑방을 모서리 한 쪽으로 둬 방과 방이 마주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통로가 마루 형식으로 돼 있는 것도 특이하고 사랑채 주변 높은 곳에는 사당이 있다.사당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은 송첨종택이 전체적으로 ‘서남향’이라는 점이다.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살림집에서는 절대 방위보다 상대적인 방향을 중시했다고 한다.이에 정침(거처하는 곳이 아니라 주로 일을 보는 곳으로 쓰는 몸채의 방)의 오른쪽에 사당을 두는 제도를 따랐고 대문간도 문채의 정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공간과 의식 공간을 가르는 경계점에 위치한다.대문간과 서백당, 사당으로 이어지는 외래의 동선이 맞아 떨어져 삼위일체(세 가지의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통합되는 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과거에는 서백당 주변에 하인들이 거처하던 가림집도 있었다고 한다.서백당은 1992년 영국 찰스 황태자가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다.이 당시 찰스 황태자를 만났던 마을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저녁 늦게 손님이 온다는 소식을 급하게 들어서인지 황토를 깔고 청소하며 분주했던 기억이 있다”며 “오래 전 일이지만 ‘경주 손씨’ 문중에는 찰스 황태자와 찍었던 사진이 가보(?)처럼 걸려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서백당 앞 마당에는 500년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양민공 손소가 송첨종택을 짓고 이를 기념해 심었다고 한다.이 나무는 원줄기가 자상 90㎝ 높이에서 세 방향으로 가지를 낸 뒤, 그 뒷부분이 위로 자라 다시 세 가지를 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사람도 작게 보일만큼 그 위세가 대단해 멀리서 보면 마치 분재를 보는 것 같은 형상이다.이 밖에 송첨삼보라는 것이 있다.손씨 종가가 현재까지 소장하고 있는 세 가지 보물로 연적과 장도, 갓끈이다.용 모양의 연적은 옥으로 만들어져 있고 장도의 뚜껑은 상아에 용이 새겨져 있다.갓끈의 재료는 산호로 돼 있어 산호영이라 불리고 있다.이 세 물건 모두 세조가 공신인 손소에게 하사했다고 한다.◆살림집의 역사를 보여주다송첨종택은 집 전체가 경사지에 맞춰 뒤가 높고 앞이 낮은 배산임수의 원칙에 따라 지어졌다.송첨종택은 물(勿)자 모양의 양동마을에서 제일 위쪽 골짜기인 ‘안골’의 깊숙한 곳 경사면에 자리 잡고 있다.송첨종택의 중심은 일자형 대문채 뒤로 ‘ㅁ’자형의 몸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므’자형 모양을 이룬다.경사가 급한 땅에 있어 몸채와 행랑채 사이의 공간이 좁고 몸채의 경우 앞면과 뒷면 사이의 높이 차이가 커 정면에 놓인 사랑채의 하부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송첨종택 안에서 바라 본 주변 모습은 선조의 멋을 엿볼 수 있는 장관이 펼쳐진다.정면은 계곡의 맞은 편 봉우리에 가로 막혀 있지만 사랑채 옆면은 양동마을의 안산(집터나 묏자리의 맞은편에 있는 산)인 성주봉을 마주 대하고 있다.안채와 사랑채과 방향을 달리 한 것은 경사지에서의 지세(땅의 생김새)와 안대(집이나 묘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를 둘 다 만족시키려는 해결책으로 보인다.송첨종택의 몸채(여러 채로 된 살림집에서 주가 되는 집채) 뒷부분 지붕의 처마 높이는 양 날개채 부분의 용마루(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높이와 같다.하지만 경사가 심한 곳에 위치한 탓에 몸채에서 뒷부분 몸통을 이루는 지붕과 중간부의 양쪽에 있는 날개채 부분, 앞부분의 지붕이 서로 다른 높이로 이어져 있다.이는 지붕의 높이를 한 단씩 내리는 방법으로 영남지방의 살림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구조다.송첨종택은 대칭형 안채로 구성됐고 공간의 구성이 검소하고 간결했다.대칭형 안채는 서울과 경기 지역의 상류층 살림집에서 사용된 형식인데, 이것이 영남의 사대부 살림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또 ‘기(氣)’에 비해 ‘이(理)’를 중시하는 주리론(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재를 이(理)로 보는 이황의 학설을 계승한 영남학파의 철학)의 살림집 계획 방법이라는 속설도 있다.이는 실용성보다는 원칙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그래서일까.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개방적인 구조를 갖는 한옥 구조와 달리 송첨종택 등 양동마을의 집은 모두 원리원칙적인 느낌을 많이 받았다.반‧상의 공간, 내‧외의 공간, 종손‧지손의 공간이 구별되고 영남학파의 전통을 잇고 있어 집의 구조도 자연스레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500여 년이 넘는 전통의 향기를 품은 채 100여 호가 넘는 고가옥과 초가집들이 들어선 양동마을에서 송첨종택이 갖는 의미는 상당하다.내가 바라 본 송첨종택은 그 당시 경북지역의 양반 가옥 형태를 가장 잘 표현해 낸 건축물이었다.답답한 도시를 떠나 전통 가옥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양동마을의 ‘송첨종택’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이동현 기자 leedh@idaegu.com

학생리포터…양동욱 청구고 2학년

코로나19의 기세가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재확산하면서 대구시교육청도 지난 23일 ‘밀집도 최소화를 위한 등교수업 방안’을 발표했다. 애초 2학기 때 초‧중‧고교 모두 정상 등교하도록 한다는 게 시교육청의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가 2차 팬데믹 현상을 보임에 따라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를 전국으로 확대했고 그에 따라 대구시교육청은 다음달 11일까지 초‧중학교는 학교 밀집도를 1/3로, 고등학교는 2/3로 유지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등교일수가 줄어들고 원격수업의 비중이 다시 높아진다는 얘기다.백신과 치료제가 나오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인 만큼 원격수업이 이뤄진 지난 몇 달을 돌아보며 숨고르기를 하고 장기전에 대비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원격수업은 교수-학습 활동이 서로 다른 시간 또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형태를 의미한다. 교사는 교실 내에서 시설 장비를 이용해 수업을 하고 학생들은 각 가정에서 PC나 휴대폰 등 다양한 통신기기를 통해 접속한다.우리나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IT 강국이고 스마트 기기 보급률과 정보 통신 능력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 자부해 왔기 때문에 많은 학생과 학부모가 기대와 걱정을 안고 정규과정의 온라인 수업을 올해 초 시작했다.원격 수업의 유형으로는 Zoom, 구글 행아웃(밋), MS-팀즈, 카카오톡, 라이브밴드 등을 활용한 실시간 쌍방향 원격수업과 학급홈페이지, e-학습터, EBS온라인 클래스 등을 이용한 100% 운영 과제 제시형, EBS 동영상 등 콘텐츠 제시형이 있었다.물론 학년별로 순차적으로 시작한 온라인 수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시스템 접속 지연 등 다수의 문제점도 발견됐다.그러나 대다수의 교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낯선 환경 속에서도 학년별로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라이브 스트리밍 수업과 구글 클래스룸 수업을 이어갔다. 수업 내용을 직접 촬영해 편집하고 유튜브로 공유하는 등의 열정을 보이는 교사들도 많았다.무슨 일이든, 어떤 제도든 처음 시행하는 일은 그만큼 충분한 준비 기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안정화 되어가기 마련이다.온라인 수업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기는 하지만 표준화된 수업 관념을 깨고 창의성을 살리는 기회가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찾아볼 수 있다.코로나19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많은 다른 나라의 학교에서도 원격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원격수업이 점차 정착되면서 학교 현장에서도 이에 대한 경험이 축적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내셔널지오그래픽이나 NY타임스 등에서 나온 분석 기사는 원격수업에는 소통의 비언어적 측면이 빠져 있다는 인지과학적 측면의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하지만 고등교육 온라인 교육의 대명사 미네르바 대학의 학생들은 전통적 대면 방식으로 교육받은 학생들에 비해 비판적 사고나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다.새로운 방식에 대해 처음에 힘들어하던 교사, 학생들은 이제 어느 정도 적응 단계에 들어갔기에 원격수업의 운영에 다양한 관심과 시도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또한 미래 학교와 온라인 수업에 대해 첫 발을 내딛은 현재 우리의 모습은 매우 긍정적이라 생각한다.가을이 오기도 전에 2차 팬데믹 유행 조짐이 심상치 않다. 그러나 우리는 움츠리지 않고 앞으로 온라인 수업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언택트 교육의 진화를 보여줄 거라 믿는다.앞으로도 우리는 살면서 2020년보다 더 다양한 환경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유사시에 대비해 조금씩 꾸준하게 발전한다면 또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양동욱청구고 2학년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양동시편2-뼉다귀집

양동시편2―뼉다귀집/ 김신용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양동골목에 있었지요/ 구정물이 뚝뚝 듣는 주인 할머니는/ 새벽이면 남대문 시장바닥에서 주워온/ 돼지뼈를 고아서 술국밥으로 파는 술집이었지요/ (중략)/ 날품팔이지게꾼부랑자쪼록꾼뚜쟁이시라이꾼날라리똥치꼬지꾼/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에게/ 몸 보하는 디는 요 궁물이 제일이랑께 하며/ 언제나 반겨 맞아주는 할머니를 보면요/ (중략)/ 뼉다귀 하나로 펄펄 끓는 국물 속에 얼마나/ 분신하고 싶었던지, 지금은 힐튼 호텔의 휘황한 불빛이/ 머큐롬처럼 쏟아져 내리고, 포크레인이 환부를 긁어내고/ 거기 균처럼 꿈틀거리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어둠 속, 이 땅/ 어디엔가 반드시 살아있을 양동의/ 그 뼉다귀집을 아시는지요- 무크지 『현대시사상』 1집(1988).....................................................시인들의 전력만큼 ‘버라이어티’한 직업군이 또 있을까만 1988년 김신용 시인의 등장은 문단에서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열여섯 나이에 부랑을 시작하여 서울역 지하도와 대합실이 숙소이자 놀이터였던 그는 동냥은 물론 끼니를 해결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매혈과 각종 ‘치기’범죄도 불사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풀빵구리에 쥐 드나들 듯 감방과 양동을 오가면서 별을 5개나 달았다. 그러는 동안 장르불문 그가 감옥에서 읽어치운 엄청난 독서량은 놀라울 정도였고, 그 독서와 사유를 바탕으로 마흔넷에 ‘陽洞詩篇’을 발표하며 시단에 이름을 올렸다.이 시는 지금은 도려내진 서울의 환부 ‘양동’에서 화염처럼 살았던 지게꾼출신이 무림고수로의 등극을 예고하며 내뽑은 칼날 위 섬광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陽洞’은 경주 양동마을과 동네 이름은 같으나 그 속살은 천양지차이로 과거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가려진 슬럼가를 말한다. 바깥에서 보면 치부이지만 도시의 부랑자, 똥치(창녀), 쪼록꾼(매혈자), 일용잡부, 마약중독자, 양아치 등 밑바닥 인생의 총집결지이며 본산이었다. ‘오로지 몸을 버려야 오늘을 살아남을 그런 사람들’ 하루하루가 고단한 인생들에게 뼈다귀 국물은 거의 유일한 보양식이다.시인은 그걸 안주삼아 작살주(막걸리에 소주를 탄 것) 몇 잔 들이키면 내장 곳곳이 가로등 켠 것처럼 환해지고 마침내 똥구멍 끝이 노글노글해지면 ‘씨부랑탕’ 욕이 나오고 노래가 나오고 그런 다음에 시가 나온다고 했다. 그렇게 시가 그에게로 가서 그를 살려냈다. 문학은 선택된 재능을 지녔거나 가방끈 긴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돈과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한 물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들이댈 수 있는 장르이다. 인간과 자연, 사물과 현상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의 자세만 가진다면.‘톰 소여의 모험’의 마크 트웨인은 초등학교만 나왔고 헤밍웨이는 시골의 평범한 고등학교 출신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인생 밑바닥을 헤매고 다닌 알콜 중독자였다. 불우하고 험한 생을 살았던 시인은 말할 수 없이 많다. 다만 그들의 공통점은 세상을 흐물흐물 순응만하지 않고 뜨겁게 살았다는 점이다. 김신용 시인 역시 둘레의 삶을 뜨겁게 연민하고 처절하게 번민하였다. 그렇게 빚어진 시이기에 시인의 체험 공간을 한번 가보지 않고 ‘뼉다귀집’국물을 마셔보지 않아도 그 연민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리라.

2019 수필대전, 양동 풍경

입선 송시내 여름 한낮, 양동은 정적이 흐른다. 강렬한 햇살이 무색하도록 마을은 숙연한 분위기다. 견딜 수 없는 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시간은 언제부터 멈추었을까. 낡은 흑백사진 속을 걸어가는 느낌이다. 양동 풍경마을 입구에부터 구릉의 언덕배기를 올라가며 자리 잡은 기와집들이 주변의 풍경과 더불어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같은 공간이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이곳은 단순히‘좋다’와‘나쁘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울림이 있다. 관가정(보물 제442호)과 서백당(중요민속자료 제23호), 향단(보물 제412호), 무첨당(보물 제411호)까지 사대부의 고택들이 처음 건축되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단정하게 서 있다. 담이 나지막한 골목을 걷다 보면 대문이 열리고 열 살 무렵의 댕기를 두른 아씨가 얼굴을 내밀 것만 같다. 키 큰 접시꽃이 호기심 가득한 아씨처럼 담장 밖을 구경한다.아마도 소작인의 집이었을까, 한길 쪽으로 반쯤 열린 나무 대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끌린 듯 다가가서 문안을 들여다본다. 가르마처럼 정갈하게 가꾼 텃밭과 반질반질하게 손질한 장독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잔디를 심은 조그만 마당을 가운데 두고 기와지붕의 본채와 슬레이트 지붕의 아래채가 얌전하게 앉아있다. 모든 것이 친숙한 풍경이다. 방학이면 찾아가던 외할머니댁이 연상된다. 그 집에서 하루를 묵기로 결정한다.볼이 발그레한 주인 할머니는 열아홉에 영천에서 시집와서 육십여 년을 양동에서만 살고 있다고 하신다. ‘평생을 양동에서만 사셨으면 세월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지 않았을까?’나는 알고 있다. 우물 안의 세상은 고요해서 작은 바람에도 오히려 더 크게 흔들린다는 것을.하얀 머리칼을 곱게 넘겨 짧은 은비녀로 쪽을 찌던 외할머니도 그랬다. 일제 강점기 산청 지리산 자락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외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해방을 맞이하고,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낮엔 국군이, 밤엔 빨치산이 마을로 내려오던 질곡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라 주변으로 곁눈질 한번 할 틈이 없었다. 자녀들이 성장해서 모두 출가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허리를 펴고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중동에서 생때같은 아들을 잃었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기가 무섭게 며느리는 아들이 남긴 보상금을 챙겨 손주를 앞세우고 떠났다. 평생을 그리움 속에 살던 외할머니는 모든 기억을 놓아버리고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하셨다.주인 할머니 얼굴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얼굴이 중첩되어 보인다. 이분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500년 동안 관습에 굳어진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그것이 안온한 삶이었을까? 외할머니의 삶이 결코 개인만의 것이 될 수 없듯 이 집 할머니의 삶도 편안한 삶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곳간에 쌀이 얼마나 있는지,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하다못해 지난 장날에 사온 치마의 붉은색조차 숨길 수 없는 집성촌에서 개인의 삶은 언제나 집단에 귀속되어 왔을 것이다. 옆집 숙부댁, 뒷집 할머니댁, 여강 이 씨, 월성 손 씨의 삶 하나하나는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양동마을 500년의 역사가 되어온 것이 아닐까.‘항상성(homeostasis)’이라는 용어가 있다. ‘생물체 내부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거나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말이다. 이는 외부 환경이 변하더라도 내부 환경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성의 개념은 사회체계와 가족에도 적용된다. 내외부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응해 사회체계와 가정생활의 균형과 안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게 협력과 보충을 요구한다. 적당한 통제와 사회화가 공동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500년 동안 마을은 하나의 생물체처럼 항상성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의식은 변화하였지만, 마을 자체가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도록 애쓰지 않았을까. 그것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해서 양동 정신을 이룬 것은 아니었을까. 기쁨과 슬픔이 연대되어 평생을 그루터기처럼 마을을 지키는 양동의 정신이 되어온 것이 아니었을까.담장엔 봉숭아가 피고, 마당엔 살구나무가, 텃밭에는 오이가 자란다.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까르르 웃는다. 저녁이 되면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도마 소리가 난다. 젊은 새댁은 분꽃을 꺾어 꽃술을 길게 늘어뜨린 귀고리를 만들어 내 귀에 걸어준다.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낡은 이불을 반듯하게 개어 놓으신다. 할머니의 할머니는 사각사각 속삭이는 소리가 나는 이불을 덮고 누우셨을 것이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 품 안 같은 햇살 냄새가 난다.밤새 꿈을 꾸었나 보다. 문 밖에선 바지런한 주인 할머니의 비질 소리가 들린다. 몇 번쯤은 목이 꺾이었을 낡은 선풍기는 그 밤 내내 밭은기침처럼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다. 김혜성 기자 hyesung@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