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69) 흥륜사 금당십성-아도화상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칠처가람이 일어나 많은 고승이 활동하는 불법(佛法)과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신라가 불교와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는 것은 칠처가람으로 우선 설명이 된다.전법시대의 사찰 흥륜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담엄사, 천왕사 등의 칠처가람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신라의 불교를 크고 깊게, 널리 알려 융성하게 일으켰던 고승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다. 고승들이 행한 놀라운 이적들은 기록으로 또는 입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들과 관련된 유명사찰도 신라의 터 곳곳에 위치하고 있거나 사라지고 없어도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더듬어 보게 한다.신라의 고승 중에도 최초의 국찰로 전해지는 흥륜사의 금당에 벽화로 그려져 있었던 열명의 고승, 신라 십성으로 불리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이번 호에서는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과 안함을 만나본다.◆삼국유사: 흥륜사의 금당 십성동쪽 벽에 경(庚)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서쪽 벽에 갑(甲)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신라의 고승: 아도화상과 안함-아도화상: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로 전해지는 아도화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도는 아두라고도 불리며 고구려에 순도가 처음 불교를 전하고 2년이 지난 시기에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다.또 그의 국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눌지왕 때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따르는 승려 3명과 지금의 구미지역 모례의 집에서 머물다 죽었다고도 전한다.이어 삼국유사에서 아도는 고구려의 사신이 신라에 와 머물며 신라의 여인과 사이에 탄생해 16세에 고구려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 불교를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아도가 불법을 전파하다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펴지 못하고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들어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구미시 해평면에는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리사가 있다. 도리사는 아도가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에 절을 지어 그렇게 부른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도리사에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아도화상의 석상, 사적비, 탱화, 세존사리탑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아도화상의 석상은 높이 1m에 이르는 입상으로 윤곽이 뚜렷하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에서는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외에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바위로 전해지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좌선대,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이라는 금수굴 등이 있다.-안함(安含)은 신라의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전히 귀족들의 세력에 따라 나라의 정책이 운영되던 진지왕시대에 태어나 왕권안정을 찾아가던 진평왕 시대를 지나 선덕여왕 9년에 입적한 고승이다.안함은 흥륜사 십성 중의 한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고승 혜숙과 함께 이포진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만나 뜻을 전하고 대흥사에 머물렀다.중국에서 십성에 이르게 한 비법과 현의와 진문을 5년 동안 배우고 605년에 우전국의 비마진제, 농가타 등의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했다. 신라에 서역의 승려들이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안함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했는데 승려 담화가 이를 필수했다. 저서로는 견문록 참서(讖書) 1권을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1권을 저술했는데 그가 안홍(安弘)이라는 설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의 환생-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거짓 항복한 신라 장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아도는 신라에 태어나 그 신라 장군의 후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아도는 신라를 방문한 고구려 대신이었던 아버지 힘을 빌려 신라에서 다시 태어났다.그러나 아버지 아굴마가 고구려로 돌아가 버리자 어린 아도를 돌봐줄 힘이 부족한 어머니에게서 제대로 무술수업을 받지 못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아도는 먹고살기에도 어려워 겨우 글을 깨치는데 급급할 정도였다.어머니는 아도가 답답해하자 16살이 되던 해에 고구려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 뜻을 펼치라고 주문하며 아버지와의 약조와 증표를 전해 주었다.-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고구려 조정의 중요인물로 성장해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 아도는 어렵게 아버지 굴마를 만났다.굴마는 아도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아보고 이름이 높았던 현창화상에게 아도를 보내 불법을 공부하게 했다. 아도는 삶의 참 이치를 깨달으며 복수에 대한 마음을 까마득히 잊고, 백성들의 깨우침을 인도하기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고구려에서 5년여 불법에 대한 공부를 익힌 아도는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아도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버지와의 만남과 공부한 내용을 낱낱이 전하고 신라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알렸다.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아도는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전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에 대해 어두웠던 궁중에서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오히려 배척하고, 아도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휘말려 오히려 핍박하게 됐다.그러던 중 왕비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왕은 전국에 방을 내려 왕비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는 3년간 세비를 면해주고, 큰 집을 하사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용하다는 의원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아도가 궁으로 들어가 왕비의 병을 고쳤다. 아도는 고구려 현창화상에게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도력에 대해서도 배움을 얻어 이미 도력이 뛰어나 그가 마음먹은 일은 작은 산이라도 가볍게 옮길 수 있었다.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었지만 왕의 후의에 반해 귀족들은 여전히 불교와 아도화상을 업신여기며 불교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도는 신라 궁궐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던 꿈을 포기해야 했다.궁궐에서 사당을 지어놓고 선대왕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일을 담당하던 세력의 핍박은 노골적이어서 아도가 견디기 어려웠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아도는 궁궐에서 도망해 구미로 발길을 옮겨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곳에 도리사를 짓고 암암리에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끈질긴 신라 귀족들의 불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아도는 후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승려로 환생해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을 다짐하며 굴을 파고 입적에 들었다.-원효로 환생: 아도는 원효로 환생했다. 처음 화랑이 되어 전쟁터를 전전하며 장군으로 눈길을 끌게 됐다. 그러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갑옷을 벗은 원효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전생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기로 했던 뜻을 생각해내고 불법공부에 매진했다. 아도는 고구려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의상을 대동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구속되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화쟁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아도는 삼생에 거쳐 그리던 불법을 만천하에 전하는 일을 해내는 훌륭한 승려로 후대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2020 경북 관광기념품 공모전 대상…‘신라의 품에’ 선정

경북도가 제23회 경북도 관광기념물 공모전 입상작 39점을 선정, 발표했다.15일 경북도에 따르면 지난달 21일부터 25일까지 경북 관광기념품 공모전을 실시해 137점의 일반상품과 24점의 아이디어분야 작품을 접수, 일반상품 34점과 아이디어분야 작품 5점을 각각 선정했다.일반상품 분야 영예의 대상은 경주시 김기득(개인)씨의 ‘신라의 품에’가 차지했다.이는 관광객들이 신라 유적과 유물을 촬영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촬영기법 중 하나인 줌아웃 효과를 도자기에 표현한 것이다.첨성대, 천마·기마인물상 등 신라시대 유물을 메모 꽃이, 티백홀더로 제작했다. 특히 티백홀더는 귀엽고 아기자기해 실용적이면서도 가볍게 구매를 유도할 수 있어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다.금상은 경주시 손영숙(개인)씨의 ‘정려(精麗)한 신라 - 정교하고 화려한 보물을 그리다’가 차지했다. 경주의 야간 관광명소와 화려한 신라시대의 유물을 일러스트화해 타일에 정교하고, 선명하게 표현한 마그넷(냉장고 자석)이다.은상은 △경기도 이준기(개인)씨의 ‘경북, 느끼고 체험하다(부석사 무량수전)’ △경주시 강전환(노즈너리)씨의 ‘경북 사찰 샤쉐와 선향’이 차지했다.동상은 경주시 김동환(가온신라)씨의 ‘경주초롱(첨성초롱)’과 대구시 김차경(복드림)씨의 ‘당신의 부자나무 석송령’, 경주시 이솔(개인)씨의 ‘DIY 내가 만드는 한복 티셔츠’가 선정됐다.아이디어 분야에서는 경기도 엄영준씨 외 4인의 ‘경북 뽑기×쪼꼬레’와 서울시 임한슬씨의 ‘김유신 장군을 지키는 열두띠 동물로 알아보는 오늘의 운세 토퍼 자판기’ 등 경북을 대표하는 관광자원의 이미지를 활용한 아이디어 총 5점이 뽑혔다.시상식은 오는 24일 경주 코모도호텔서 열린다. 수상작은 이날부터 오는 28일까지 경주 보문단지 내 경북도 관광홍보관에서 선보인다.경북도는 수상작의 경주 황리단길, 대구 동성로 등 지역 중심거리 특별전시회 개최 및 팝업스토어 운영을 지원한다. 각종 박람회 전시·판매 지원, 경북관광포털사이트 ‘경북나드리’ 홈페이지 상시 게시 등 다각적인 홍보 마케팅을 한다. 또 상품화 가능한 아이디어에 대해 컨설팅 및 향후 관광기념품 제작도 지원할 계획이다.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7)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29대 법왕은 28대 혜왕과 같이 즉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아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당시 삼국시대는 각국이 상대국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많이 활용했다.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혀가자 고구려와 백제는 앞다투어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백제 법왕은 신라가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통한 불교를 장려하고, 화랑제도를 통한 교육을 강화해 국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해 불교 장려정책을 쓰기로 했다.그러나 법왕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0대 무왕이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무왕은 법왕의 불교장려 정책에 따라 왕흥사를 대대적인 국찰로 완공했다. 이어 불법을 장려해 나라의 힘을 키워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다.◆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이고,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황 10년 기미년(599)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질 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다음해 경신년에는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고, 그때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짐승들에게도 베푼 너그러움은 온 산에 도탑고/ 돼지며 물고기도 흡족한 혜택에 사해가 인자롭다/ 갑작스레 별세했다 섭섭히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은 바야흐로 꽃다운 봄이리니.◆백제 법왕과 무왕-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으로 신라 진평왕 시대인 599년부터 600년까지 1년 남짓 왕위에 있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여선(餘宣) 등으로 전한다.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다.법왕은 혜왕과 같이 재위 기간이 짧아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 않다. 시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른 599년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모두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그리고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600년에 창건하기 시작해 무왕 때인 634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 때에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흙으로 덮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7년 충남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는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왕흥사가 법왕 이전인 위덕왕 때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법왕에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집권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으로 수나라 기록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사서에는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무왕은 특히 6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627년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무왕은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다. 611년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다.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관륵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또 무왕은 삼국유사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용의 아들로 탄생해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왕과 무왕의 신라 베끼기백제 법왕은 급성장한 신라의 국력에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하는 한편 그 힘의 바탕에 의문을 가졌다. 백제는 다소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입장에서 공격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이후 반성의 시간을 가진데 이어 만회의 기회를 노렸다.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신라의 성장배경과 힘의 원동력,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신라가 성장한 배경에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탄탄한 정신적 결집을 찾아냈다. 또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의 교육철학이 끊임없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잡기에 나섰다.법왕은 먼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가는 길을 불교적 심리전파라고 결론짓고, 불교중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법왕은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절을 짓기로 하고, 나라의 중심에 거대한 사찰 왕흥사 건설에 나섰다. 왕은 곧 나라이다는 생각에 절을 왕궁처럼 거대하게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또 전국에 불교적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사냥을 금지하며 살생을 못하게 했다. 백성들이 마음속에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상징적으로 엄격하게 불교적 이념을 전파했다. 지명법사와 같은 유명 고승을 초빙하고, 승려들의 공부를 지원했다.법왕의 이러한 판단은 신라가 흥륜사 건축에 이어 왕궁에 버금가는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나라의 중심부에 줄줄이 세워 운영하는데 영향을 받았다.법왕의 불교 진흥정책은 다음 무왕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왕은 신라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어 정책은 물론 지리적인 특성까지 속속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파악하고 있었다.무왕은 결국 왕흥사를 완공하고, 온 국민이 하나로 기원하며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동서 쌍탑을 건립했다. 왕흥사는 국민적 염원을 들어주는 미륵불을 안치하면서 미륵사로 이름을 바꾸어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박물관에 삼국시대 다양한 말 갑옷 선보인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신라와 가야, 백제 등 삼국시대의 다양한 문화재급 말 갑옷 특별전시회를 개최한다.경주박물관은 12일부터 오는 8월23일까지 신라와 가야,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말 갑옷과 고구려 고분 벽화 속 말 갑옷까지 고대 삼국시대의 말 갑옷 18점을 전시한다.함안 마갑총에서 1992년 출토된 말 갑옷과 경주 쪽샘지구 및 계림로에서 나온 갑옷 6점과 말 투구 10점 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로 전시된다.경주 황남동에서 일제강점기인 1934년 우리나라 최초로 말 갑옷이 확인된 이후 지금까지 신라, 가야, 백제시대의 말 갑옷이 전국에서 여러 점 출토됐지만 온전한 형태로 드러난 것은 많지 않다.경주박물관의 이번 특집전은 3부로 구성됐다.1부는 신라 귀족들의 안식처인 쪽샘지구에서 완벽한 형태로 발굴된 신라의 말 갑옷을 주제로 황남동 109호와 계림로 1호 말 갑옷을 선보인다. 또 1934년과 1973년에 발굴된 말 갑옷은 발굴 이후 최초로 일반에 공개한다.2부는 가야와 백제 말 갑옷 편이다. 동아시아에서 최대의 수량을 자랑하는 가야의 말 갑옷을 소개한다. 함안의 마갑총, 부산 김해와 합천 등에서 출토된 신라와는 다른 형식으로 제작된 가야와 백제의 말 갑옷들도 볼 수 있다.3부는 고구려 고분벽화 속 중장기병에서 다양한 말 갑옷과 철기병으로 불리는 당시 병사들의 무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영상으로 제작해 관람객들이 말 갑옷과 갑옷, 병장기들의 활용도를 이해하기 쉽게 했다.국립경주박물관 민병찬 관장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생활 속 거리두기 준칙은 물론 마스크도 착용해야 관람할 수 있다. 온라인 사전 예약제를 운영한다”며 “박물관 입장할 때 개인정보 동의서 작성 등은 불편하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문화제 관계자 경찰수사 도마 위에

경주 신라문화제 예술감독의 금품수수 문제가 행정사무감사에서 도마 위에 올랐다.경주시의회 문화행정위원회는 지난 10일 문화관광국을 상대로 행정사무감사를 펼쳤다.이날 최덕규 문화행정위원장과 김동해, 서선자, 한영태 의원은 차례로 금품수수로 직위해제된 예술감독 등 신라문화제의 현재 상황과 앞으로의 운영 방향 등에 대해 집중 성토했다.최덕규 문화행정위원장은 “지난해 신라문화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감독이 업체로부터 250만여 원의 금품을 제공받아 직위 해제됐다”며 “관련 담당자도 사직서를 제출한 경위에 대해 설명하고, 신라문화제 시스템 문제에 대해 개선방안이 있는냐”고 지적하고 대책을 따져 물었다.최해열 문화관광국장은 “예술감독은 금품수수설이 드러나 직위 해제하고, 담당자는 사직서를 제출해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문화재단이 축제를 주관한다 해도 가점하는 제도는 없다. 재단이 준비되면 업무를 이관할 것”이라고 답했다.김동해 부의장, 서선자 의원과 한영태 의원 등은 “경주시는 잦은 인사이동으로 업무의 연속성이 없고, 전문성도 떨어진다”면서 “축제 주관을 위해 설립된 전문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재단이 축제를 주관하도록 하라”고 입을 모았다.또 시의원들은 “신라문화제와 같은 대표적인 축제는 뚜렷한 주제가 있어야 하고, 행사의 연속성, 장소와 축제 시기 등의 정례화 등으로 핵심적인 부분은 매년 일회성 행사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정통성 있는 행사로 추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한영태 시의원은 “지난 신라문화제 문제로 관계인사가 금품을 수수해 직위해제 되고, 담당자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으로 물의를 빚었다”며 “또 경찰에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주시장은 시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최해열 문화관광국장은 “올해 신라문화제의 원만한 추진을 위해 지난 2월부터 문화재단 등의 관계기관과 협의하면서 시민들의 참여를 위해 이벤트 공모 등의 방법으로 준비하고 있다”며 “신라문화제가 우리나라 대표적 명품축제로 발전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추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문화제 대한민국 명가명품 대상 수상

경주 신라문화제가 전국 유명 축제로 인정받았다.경주시는 10일 서울 세종호텔에서 열린 ‘2020 대한민국 명가 명품’ 시상식에서 천년고도 경주의 최대 문화관광축제인 신라문화제가 대상을 받았다고 밝혔다.대한민국명가명품 대상은 한국소비자협회가 전국 유명 축제 중 가장 사랑받는 축제를 선정해 시상하는 제도다.이번 평가에서 신라문화제는 빅데이터로 본 경북도내 축제 중 가장 인기가 높아 지역축제 브랜드 부문 대상을 차지했다.1962년부터 시작된 신라문화제는 1970년대 들어 규모가 확대됐다. 1998년부터 경주세계문화엑스포와 경주한국의 술과 떡 잔치에 밀려 고전했으나 민선 7기 들어 신라문화제의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과 콘텐츠 공모로 체험형 참여축제로 발전시키며 옛 명성을 되찾아가고 있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신라문화제가 대상을 차지한 것은 26만 시민 모두가 지혜를 함께 모아 일궈낸 쾌거다”며 “올해 신라문화제도 성황리에 개최해 문화도시의 위상을 더 높일 수 있도록 시민들의 변함없는 사랑과 참여를 기대한다”고 말했다.한편 ‘제48회 신라문화제’는 오는 10월8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황성공원과 시가지 일원에서 열린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시, 신라예술 재조명 ‘문화제’ 준비 박차

경주시는 4일 시청 알천홀에서 ‘2020 제48회 신라문화제 추진상황 보고회’를 개최했다.제48회 신라문화제는 오는 10월8일부터 14일까지 7일간 황성공원과 경주시가지 일원에서 열린다.이날 보고회에는 주낙영 시장을 비롯 신라문화선양회 및 신라문화제추진위원회 위원과 관계공무원 등 50여 명이 참석했다.올해 신라문화제는 ‘깨어나다 천년왕도 신라탄생의 비밀’이란 주제와 ‘위대한 신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란 슬로건으로 신라건국신화의 비밀을 풀어본다.문화제는 신라탄생 설화 등 11개 분야 42개 행사로 역대 가장 많은 지역 문화예술인과 시민, 관광객이 함께 참여해 찬란했던 신라문화와 예술을 재조명한다.이번 신라문화제 주요 행사로 신라박혁거세 거서간 즉위식을 비롯한 사로 6촌의 평화롭고 슬기로운 삶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신라의 전통문화와 다양한 생활상의 체험행사로 진행한다.특히 시는 이번 신라문화제를 지역예술의 한계를 벗어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글로벌 축제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한다.참여형 체험축제로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침체한 지역경기 활성화를 도모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올해 신라문화제가 코로나19로 제약받았던 생활에 활력을 되찾고 침체한 지역경기를 회복시키는 한편 신라문화를 꽃피운 경주가 21세기 세계문화를 선도하는 문화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5) 신라 불교의 공인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수용할 때는 어떠한 계기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의 큰 발전을 가져온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그러한 절차가 있었다. 이차돈이 목숨을 바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널리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열었다.삼국유사는 법흥왕을 원종, 이차돈을 염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이 불법(佛法)의 참됨을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지만 토착신앙에 뿌리가 깊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왕의 마음을 헤아린 하급관리 이차돈이 불법의 전파를 위한 길을 제시했다. 목숨을 바친 이적으로 귀족들도 감복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법흥왕의 불교 공인에 이어 신라에는 빠르게 불법이 확산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받아들였지만 국가적인 경영이념으로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뜨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는 상당한 힘이 됐다.이차돈의 희생은 나라를 크게 일으키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큰 사랑의 불씨가 되었다.◆삼국유사: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편찬한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신라 불교 공인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신라 법흥대왕 때이다. 궁궐 안을 잘 다스리며 해 뜨는 나라의 곳곳을 굽어 살피다가 옛날 한나라의 명제가 꿈을 꾸고 불교가 동쪽을 흘러들어온 일을 생각하고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 백성들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고자 하였노라”고 말했다.그러나 신하들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큰 뜻만을 지키고자 하고, 절을 짓겠다는 신령스런 대책에는 따르지 않았다.대왕이 탄식하며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받들지 못하는구나. 위로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 뭇 백성들의 기쁨을 주지 못하네, 나라를 다스리는 바쁜 중에도 마음을 불교에 두었더니 누가 이 일을 도와주리오”라며 개탄했다.그때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 종은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대나무나 잣나무처럼 빼어난 바탕에다 맑은 거울 같은 뜻을 품었다.22세의 염촉이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신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외람되지만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며 뜻을 아뢰었다.“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고 왕이 말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 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다”고 듣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다”라 칭찬하며 감복했다.이에 왕은 짐짓 위의를 갖추고 동서로는 풍도를, 남북으로는 상장을 벌려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늦추려 하는가”라며 물었다.이에 여러 신하는 전전긍긍하며 수선스레 맹서하고 여기저기 손가락질만 하는 것이었다. 왕은 사인을 불러 나무랐다. 사인은 얼굴빛을 잃고 어떤 말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왕이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 명령을 하니, 형리가 묶어 관아 밖으로 나갔다. 사인이 맹서를 바치자 옥리가 목을 베는데,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하늘은 사방이 캄캄하게 빛을 잃어 어둡고 땅은 육방이 진동하며, 비처럼 내리는 꽃이 표표히 떨어졌다.왕은 슬픔에 겨워 비통한 눈물을 옷에 적시고, 대신들은 근심스러워 식은땀을 관복에 흘렸다. 달디 단 샘물이 홀연히 솟아나고, 물고기와 자라는 다투어 튀어 오르며, 곧은 나무는 먼저 꺾이고, 원숭이는 떼 지어 울었다.춘궁에서 일하던 동료는 피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월정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애끓듯 서러운 이별을 했다.관을 쳐다보며 우는소리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 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라고 했다.이어 북산의 서쪽 마루에 장사지냈다. 나인이 슬퍼하며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짓고 자추사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갖추어 대대로 영화를 지키고, 사람마다 도를 행해 불법의 이로움을 깨달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이차돈의 결심이차돈은 원래 진골 출신의 왕족이다. 아버지가 궁궐에 일하였으나 청렴해 살림살이는 풍족하지 않았다. 차돈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착해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글 읽기를 좋아해 일찍이 관복을 입었다.차돈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꿈에 하얀 백조가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향해 크게 날갯짓을 하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큰 사람이 될 것으로 믿고 아무에게도 태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한번은 이차돈이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 온 몸이 멍들고, 옷은 먼지를 덮어써 거지꼴이었다. 못된 왈패들이 서당의 친구를 괴롭히는 현장을 보고, 책을 던져놓고 친구를 끌어안고 뭇매를 맞았다.이렇듯 차돈은 심성이 착하고 의리가 좋아 친구들이 늘 옆에 붙어다녔다. 그러나 차돈은 공부하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차돈은 글 읽기는 물론 무술 수업에도 착실하고 지혜로웠으며, 체격이 관운장을 닮은 장군 틀이었다.이차돈이 차분하게 글 읽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불법의 영향이 크다. 인도에서 당나라와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유학승과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사상적으로 불교에 깊게 몰두했다.차돈이 벼슬에 나아가 공무를 보면서도 불교 서적을 읽는데 열중해 그는 이미 신라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그가 스무 살 생일을 맞는 날 저녁, 집에서 성인식을 겸해 관부로 나아간 일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무르익어갈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도인이 찾아왔다. 저녁상을 받은 도인이 차돈에게 부처가 그려진 비단 폭과 경전을 전해주며 불법에 대한 공부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그날부터 차돈은 부처님이 그려진 비단을 사당에 걸어두고 매일 경전을 읽으며 불도를 닦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면서 차돈은 부처님이 나타나 빙그레 웃으며 손짓하며 부르는 꿈을 여러 차례 꾸었다.왕이 불교를 널리 알리고 싶어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할 터이니 여러 신하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라고 수차례 설득했다. 차돈의 확고한 신념에 법흥왕도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아끼는 신하 차돈의 목을 베자 우유 같은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진동하며 향기나는 꽃 비가 내렸다. 만 백성이 어버이가 돌아가신 듯 슬퍼하며, 한편으로 기뻐하며 찬양하고 불법을 믿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4) 칠처가람 (5·끝) 영묘사

신라는 전불시대에 이미 일곱 곳에 절이 있었다. 불국토로 발전할 인연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칠처가람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칠처가람은 황룡사, 분황사와 같이 지금도 크게 울림을 주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사천왕사는 천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 등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국립사찰로 이름이 전해져 유명하다.반면 영흥사와 담암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담암사는 오릉의 남쪽이라는 기록과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영흥사는 절터조차 분명하지 않다.◆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 중 하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 중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이다. 이 절터에서 금당터를 비롯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이 영묘사 터로 밝혀졌다.영묘사의 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묘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채고 병사를 보내 소탕했다는 기록이 있다.영묘사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풍요라는 향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는 노동요의 시초였다고 한다.경덕왕 23년 764년에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세조 6년 1460년에 봉덕사의 신종을 이 절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담암사담암사는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전불 칠처가람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진다. 절은 신문왕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청전은 사위를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 오릉 남쪽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해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담엄사지에는 삼층석탑 1기와 당간지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담엄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절터는 거의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당간지주와 초석 등의 남은 석재들은 박혁거세의 제전인 숭덕전을 건립하면서 홍살문과 기초 석 등으로 사용했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당간지주 1기는 오릉 내부의 숲에 방치되어 있다.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농경지와 오릉 주차장 부지로 변했으나 신라시대 육부촌 시절에는 이곳에 알영양산촌이 있었다고 전한다.◆영흥사영흥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경주시 황남동에 있었던 절이라 전한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다.기록으로는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사학자들은 지금의 서천변 야구장 일대를 영흥사지로 본다.신라 법흥왕 22년 535년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영흥사를 창건했다. 2년 뒤 법흥왕이 왕위를 물리고 출가하자 파도부인도 법명을 묘법이라 하고 이 절에 출가해 머물렀다.진흥왕 33년 572년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도 법명을 묘주라 하고는 역시 영흥사에 출가했다.신문왕 4년 684년에 이 절을 관리하는 성전을 설치했다. 경덕왕 18년 759년에 감영흥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지귀의 사랑진평왕 말기에 서라벌 장터에 노리개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는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땅만 살피는 사람이라 하여 지귀라는 별명이 붙었다.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오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데 지귀의 점포에 곱게 단장한 아가씨 둘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봄처녀들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제비처럼 조잘되며 지귀 점포의 노리개를 요리조리 살폈다.지귀는 손님들의 시중을 곧잘 들며 비위를 잘 맞춰 웬만한 손님은 모두 뭐라도 하나쯤 사들고 가도록 하는 장사의 신이다. 그런 지귀의 상술은 장터에 이미 쫙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로 그의 입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들면 손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날씨 타령, 허접한 이웃 부부의 싸움 이야기라도 늘어놓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그런데 봄비 내리는 그날 운명처럼 찾아온 두 여인의 모습에 지귀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아가씨들이 노리개를 들고 재잘대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격을 묻는 손님의 말도 듣지 못했다.“이거 얼마예요” 방울 노리개와 토끼모양 머리핀을 하나씩 들고 지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쫑알거리는 두 아가씨의 추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귀가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묘령의 두 여인은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여행을 즐기는 진평왕의 공주 선덕과 시녀 만주였다. 지귀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시녀 만주가 넌지시 장난을 걸었다. “우리 아씨 예쁘지요”라며 눈을 찡긋하자 홍당무가 된 지귀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노리개를 포장하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지귀는 선덕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도 설쳤다. 이튿날부터 장터에 나온 지귀는 혹여 그 처녀들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선덕과 만주는 지귀의 노리개를 사가는 단골이 되었다. 지귀는 어느새 마음속 깊이 선덕을 앉히고 매번 그가 만든 노리개를 선물로 준비해 건네곤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지귀는 그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독특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지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인형들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살아있는 것 같아 선덕도 매우 좋아했다.선덕이 자신이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지귀는 행복에 겨워 밤을 낮 삼아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진평왕의 죽음으로 맏딸이었던 선덕여왕은 왕위를 이어받아 장례와 국정을 살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선덕여왕이 즉위 1년을 맞아 진평왕릉으로 인사차 하는 나들이 행렬을 바라보다 지귀는 까무러치게 놀라버렸다. 자신이 밤낮으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여인이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 만주도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여왕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선덕여왕은 즉위 3주년을 맞아 영묘사로 제를 올리러 가면서 만주를 통해 지귀에게 아버지를 닮은 실물크기의 인형을 주문했다. 그 이후 지귀가 깎은 나무인형들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영묘사 법당에 하나씩 쌓여갔다. 마침내 지귀는 법당을 가득 채운 인형을 끌어안고 행복한 꿈을 꾸다 심화가 일으킨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에서 삼국유사 기행 신라 불교 공인 과정 둘러봐

삼국유사기행단이 경주지역에서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답사하며 문화콘텐츠 발굴 작업을 이어가는 2020년 첫 번째 기행을 가졌다.삼국유사기행단 40여 명은 지난 23일 황룡사 역사관에서 출발해 흥륜사, 흥륜사지 경주공고, 영흥사지, 신라불교를 공인한 법흥왕릉, 이차돈의 목이 떨어졌다는 금강산 백률사 등을 답사했다.문화해설을 맡은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흥륜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이자 법흥왕이 최초 국립사찰로 지은 절”이라며 “불교공인과 율령공포 등의 많은 업적을 기록하고 말년에 흥륜사에서 승려로 생을 마감했다”고 말했다.또 “법흥왕은 불교를 국가경영 철학으로 정립하기 위해 아끼는 신하 이차돈의 목을 치면서 불교를 공인했다”며 “세상의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면서 법흥왕의 과감한 결단을 칭송했다.이어 “신라의 칠처가람으로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담암사, 영흥사, 사천왕사 등의 대규모 절이 있었다”면서 “신라는 석가모니 이전에 이미 불교가 융성하게 될 인연이 이어지고 있던 땅”이라고 설명했다.삼국유사 기행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올해는 3~5명씩 소규모로 답사여행을 이어오다 이날 처음으로 40명을 선착순 신청을 받아 진행했다. 기행단 운영은 대구일보와 이노버즈 주관으로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진행하는 사업이다.다음달 삼국유사 기행은 흥륜사의 금당십성, 가섭불연좌석, 황룡사 장륙,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약사불 등에 대한 답사를 이어갈 계획이다.김구석 소장은 “삼국유사 이야기는 황당한 신화, 전설처럼 엮어진 내용도 많이 있지만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역사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했다.이어 “기행이 2년째 접어들어 신라의 흥망성쇠에 이어 불교의 전래 흥법편, 탑과 불상에 대한 이야기의 탑상편으로 이어지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며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윤경희 청송군수 동정

△ 2020 대한민국 대표브랜드 대상 시상식 참석 = 오전10시 서울 신라호텔임경성 기자 ds5ykc@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0) 칠처가람 (1) 흥륜사

신라에 불교가 시작된 시기는 정확하게 특정되지 않고 있다. 아도화상이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시기는 미추왕과 눌지왕 때로 추정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신라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왕실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라에서 최초로 창건한 사찰은 흥륜사라는 기록이 있다. 흥륜사에서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이 법회를 주관했다. 나중에는 진흥왕에 이어 법흥왕까지 승복을 입고 흥륜사 주지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지금 알려지고 있는 흥륜사는 발굴 과정에서 영묘사 명문의 기와가 출토되면서 영묘사 자리로 추정되고, 경주공고 자리가 흥륜사 터로 짐작된다.신라는 불국토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에, 석가모니가 불법을 전파하기 이전에 신라에 불법을 전했던 일곱 곳의 절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칠처가람이다. 전법시대의 불적 칠처가람을 둘러본다.◆삼국유사: 칠처가람아도본비에 아도의 불법 공부와 칠처가람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인데 정시 연간 240~248년에 조조의 위나라 사람 아굴마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그를 가까이해 아도를 낳았다. 다섯 살 때 어머니가 출가하라 하였고, 열여섯에 위나라로 가서 굴마를 만나 뵌 다음 현창화상의 가르침을 받아 공부했다.열아홉 살에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자 어머니가 “이 나라는 이제껏 불교를 모르고 있다. 지금부터 3천여 달이 지난 다음, 계림국에 성왕이 나타나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라며 칠처가람에 대해 이야기했다.서울 안에 일곱 군데의 가람터가 있다. 첫째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 둘째는 삼천기, 셋째는 용궁의 남쪽, 넷째는 용궁의 북쪽, 다섯째는 사천의 끝, 여섯째는 신유림, 일곱째는 서청전이다.모두 전생의 부처님 때 가람터요 불법의 물이 오래도록 흐를 땅이다. 너는 거기에 가서 큰 가르침을 널리 퍼뜨려 마땅히 동쪽에서 부처님 앞에 목탁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아도는 불교를 전파하러 계림에 이르러 왕성의 서쪽 마을 지금의 엄장사에 머물렀다. 그때는 미추왕이 즉위한 지 2년인 계미년(263)이었다.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가르치겠다고 청했으나 이전에 보지 못한 바라 꺼리며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피신하여 속림에 있는 모록의 집에 숨었다.미추왕 3년에 성국공주가 병에 걸렸으나 무당과 의사가 고치질 못하자 사방으로 신하를 보내 의사를 찾았다. 스님은 스스럼없이 대궐로 나아가 그 병을 깨끗이 고쳤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물었다.“하찮은 중은 아무것도 얻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바라건대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 나라를 위해 복을 빌고자 할 따름입니다.”왕은 허락하였다. 명령을 내려 공사를 시작했는데 당시 풍속이 질박하고 검소하여 띠를 엮어 집을 세우고 살면서 가르쳤다. 때때로 하늘에서 꽃이 땅에 내리기도 했다. 이 절의 이름이 흥륜사이다. 모록의 누이 이름은 사씨인데 스님에게 와서 비구니가 되었다. 삼천지에도 영흥사라는 절을 짓고 살았다.미추왕이 세상을 뜨자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고 하였다. 스님은 모록의 집으로 돌아와 손수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자결했다. 아도화상이 입적한 이후로 신라에 전파되었던 불교도 사라지게 되었다.◆칠처가람: 천경림 흥륜사흥륜사는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미추왕 때 창건했다는 설과 눌지왕 때에 창건했다는 설이 부딪치고 있다. 대부분 눌지왕 때로 보는 것이 정설로 통용된다.신라시대 당시에는 흥륜사도 국가사찰로 건립, 운영됐지만 여전히 초가로 검소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명으로 사찰이 건립되어 운영되었지만 왕이 죽고 자연히 폐허가 되었다.흥륜사는 법흥왕 당시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의 대가람으로 중창되었다. 이차돈의 죽음에 따른 이적에 놀라고, 감탄해 천경림에 대가람을 중창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는 진흥왕 5년 544년에야 완공해 대왕흥륜사라 했다.그리고 엄격하게 통제되었던 승려 되기를 해제하고, 일반 백성에게 출가해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진흥왕은 만년에 스스로 삭발하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아 흥륜사의 주지가 되었다.흥륜사는 나라가 주관하는 도량으로 왕실과 국가의 재앙을 물리치거나 복을 비는 가람으로 발전했다.흥륜사와 관련된 전설과 설화도 다양하다.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전 재산을 보시해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의 절이 흥륜사다. 또 호랑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출세가도를 걷게 된 나무꾼 청년 김현의 이야기도 흥륜사의 탑을 돌면서 염불하는 복회에서 비롯된다.흥륜사가 유명한 것은 금당에 신라십성을 그린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의상·혜숙·안함의 그림이 있었고,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자장·혜공·사파의 상이 그려져 있었다.흥륜사 금당의 좌우에는 행랑이 있었고, 좌경루와 남지 연못과 탑이 있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길달문은 귀교를 건축했다는 비형의 무리 중 길달이라는 도깨비가 지었다고 해서 부른 이름이다.흥륜사는 방화와 중수를 거쳐 여러 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화재로 소실된 이후 완전히 폐사되었다.남은 유물로 석조와 배례석이 있다. 흥륜사 석조는 신라의 석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조선시대 동헌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옥외전시장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흥륜사의 비사흥륜사는 창건할 때부터 국가의 사찰로 승려는 물론 법회에 참석하는 인사들이 왕을 비롯한 왕가의 주요 인물들이어서 경비도 삼엄했다. 때문에 경비를 담당하는 부서도 정부의 병부에서 직접 관여했다.진흥왕은 화랑도를 결성하고,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힘을 키우는 기본으로 삼았다. 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의 세력에 힘입어 진흥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그러나 진흥왕 33년에 태자로 간택했던 아들 동륜이 죽자 흥륜사에서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선봉에 서서 전장을 누비던 정복자로서의 당당한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당시 진흥왕 하반기 정국의 전반에 실질적인 권력자로 행세하던 거칠부는 왕권에 대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떠올랐다. 거칠부는 진흥왕이 자주 드나드는 흥륜사 경비부터 자신의 직속 부하들로 전면 교체했다.이어 진흥왕의 후계자로 둘째아들 사륜을 옹립하는 절차를 서둘렀다. 거칠부는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미실에게 사륜을 왕으로 추대하면 왕후로 간택하겠다는 밀약을 하고 진흥왕 제거 수순을 밟았다.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동륜태자의 네 번째 제를 올리는 날을 거사일로 잡았다. 진흥왕이 제를 올리는 시간에 거칠부의 부하들은 진흥왕의 호위 무사들을 소리없이 제압했다. 그리고 흥륜사 출입을 완전히 폐쇄하면서 진흥왕을 감금하고 영원히 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거칠부는 진흥왕이 흥륜사에서 사망한 것으로 발표하고 둘째 아들 사륜을 왕위에 올렸다. 그가 진지왕이다.거칠부는 상대등의 지위에 올라 진지왕을 조정하며 나라의 살림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주물렀다. 진지왕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일찍 체념하고 향락에 빠져버렸다. 미실 또한 향락에 빠진 진지왕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노리부와 진흥왕의 유서를 핑계로 진지왕을 폐위하고, 진흥왕의 첫째 아들이자 태자였던 동륜의 아들인 백정을 진평왕으로 옹립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의 후예 확인하는 신라복 체험 공간 마련

‘우리는 신라의 후예입니다.’경주시가 민원실에 신라의 후손임을 확인해 보는 신라복 체험공간을 마련했다.23일 경주시에 따르면 민원인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시며 대화를 할 수 있는 휴게공간을 민원실에 조성했다. 한쪽 편에는 신라복을 비치해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도 설치했다.신라복을 입고 포토존에 마련된 자동촬영시스템을 이용해 첨성대, 월정교, 주상절리, 양동마을 등 경주지역 유명 문화관광지를 배경으로 인생 샷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사진은 현장에서 바로 휴대전화로 전송받을 수 있다.경주시는 민원인들의 신라복 체험을 위해 자원봉사자를 배치했다. 자원봉사자는 특히 혼인신고 민원인에게는 축하카드를 작성, 지급하는 한편 출산장려정책 등을 홍보한다.임산부를 위한 지원 제도와 출산장려 지원금, 육아용품 알뜰시장 운영 등도 설명한다. 혼인신고를 위해 민원실을 방문하는 신혼부부는 하루 평균 5~7쌍 정도다.자원봉사자들은 또 다른 지역에 주소지를 둔 혼인신고자에게는 전입신고를 권유하면서 지원제도도 설명한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코로나19 사태로 힘들지만 시청을 방문한 시민들이 신라복 체험을 통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며 “민원실을 시민들의 휴게실이자 시정을 홍보하는 장소로 적극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경주시는 지난해 민원인 전용공간인 도란도란 쉼터를 조성해 민원인들의 인터넷, 팩스, 복사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 우선 배려창구와 모유 수유실, 유아놀이방 개설 등 민원인 편의를 증진하는 데 노력한 것을 인정받아 ‘국민행복 민원실’로 선정돼 행정안전부 인증을 받기도 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9) 불교의 전래

우리 역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 순으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교육한다. 그러나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가 전해졌다고 주장하는 학설이 더러 시선을 끌기도 한다. 나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료를 제시하면서 목소리를 높여 수긍이 가기도 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는 속담이 생각나기도 한다.오늘날 불교가 민중 속 깊숙이 퍼진 것과 다르게 삼국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전파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이후 원효대사가 주장한 소승불교가 일반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불교는 본격적으로 백성들에게 전파되면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또 건축, 조각, 미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화예술로 승화되었다.아도화상이 전해 출발한 신라에서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발전하면서 화랑정신과 결합해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근원이 되어 국민들에게 국가적 이념으로 승화했다.삼국유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례로 살펴보고, 화려하게 불교문화로 꽃피운 신라의 불교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써본다.◆삼국유사: 불교의 전래-순도가 고구려에 오다고구려 본기에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부견이 사신과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보내왔다. 또 4년(374)에 아도가 진나라에서 왔다. 다음해 2월에 초문사를 짓고 그곳에 순도가 있게 하였으며, 이불란사를 짓고 아도가 있게 하였다.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교가 비롯된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승전에서 “두 사람이 위나라에서 왔다”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실은 전진에서 온 것이다. 또 말하기를 초문사는 지금의 흥국사이고, 이불란사는 지금의 흥복사라 한 것도 잘못이다.고구려시대 안시성, 다른 이름으로 안정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요수는 다른 이름으로 압록이고, 지금은 안민강이라고 한다. 어찌 개성의 흥국사를 이르는 것이겠는가.일연선사는 “압록강 봄 깊어 풀빛 고웁고/ 백사장 갈매기 한가히 조는데/ 노 젓는 소리에 깜짝 놀라 멀리 날으네/ 어느 곳 고깃배인지, 안개 속에 이른 손님”이라고 읊었다.-마라난타가 백제 불교를 열다백제 본기에 “제15대 침류왕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서역의 승려 마라난타가 진나라에서 왔다. 예의를 갖추어 궁중으로 맞아들여 머물게 했다. 다음해에 도읍지인 한산주에 절을 짓고 승려 열 사람에게 불교를 가르쳤다. 이것이 백제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이라 적고 있다.또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392) 2월에 불교를 잘 믿어 복을 얻도록 하였다. 마라난타는 번역하면 동학이다.일연선사는 “천운이 창조되던 처음에는/ 대체 쉬웁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늙은이는 춤과 노래에 실어 절로 풀고/ 옆 사람까지 이끌어 눈뜨게 했다”고 읊었다.-아도가 신라 불교의 기초를 놓다신라 본기는 “제19대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으로 왔다. 그곳 사람 모례가 집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잘 모셨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통해 옷과 향기나는 물건들을 내려주었다.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쓰일 데를 알지 못해, 사람을 시켜 향을 가지고 온 나라를 돌며 물어보라 했다. 묵호자가 그것을 보더니만 이는 향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태우면 향기가 나는데 정성을 신성에게 알리는 것이오. 만약 이것을 태워 소원을 빌면 영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고 적었다.때마침 왕의 딸이 병석에 눕자 사람을 시켜 묵호자를 불러왔다. 향을 태우며 빌자 딸의 병이 곧장 나았다. 왕은 기뻐하며 많은 상을 내리려 하는데 잠깐 사이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또 21대 비처왕 때에 아도화상이 세 사람을 데리고 모례의 집에 왔다. 겉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한데 여러 해를 머물다 병 없이 죽었다. 같이 왔던 세 사람은 머물며 경문과 율법을 가르쳤는데 더러더러 믿는 사람이 생겨났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아도의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으로 이름은 고도령이다. 고도령은 평양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을 경영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아굴마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그 식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도령과 가까워지게 되어 아도를 낳았다.고도령은 아도가 12살이 되자 “네 아버지는 중국의 대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는 분이시다. 중국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공부를 하라”고 일러 보냈다.아도가 중국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도의 아버지는 궁궐에서 재상의 지위에 올라 황제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아들을 황제에게 인사를 시켰다. 황제는 아도를 아껴 곁에 두고 3년이나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공부하게 했다.아굴마는 15살이 된 아도를 공부가 깊은 현창스님에게 보내 불법에 대해 철저하게 배우도록 했다. 아도는 재치가 있었다. 궁중에서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에게서 칭찬을 받으며 많은 공부를 빠르게 습득한 데 힘입어 불법에 대한 이해도 습자지에 먹물 스며들듯 빨아들였다.아도의 불교 철학에 대한 이해는 남달랐다. 현창스님과의 일문일답식 공부에서 세상의 이치를 막힘없이 풀어내며 민중들의 고뇌를 해소해 줄 수 있는 답을 찾아내는 데 집중했다.아도가 20세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그를 불러 신라 미추왕의 성국공주를 소개해주며 신라로 돌아가는 길 안내를 맡으라 일렀다. 이어 황제는 현창스님이 아도에게 부탁한 것과 같이 신라에 불법을 먼저 전하라고 당부했다.아도는 성국공주를 호위해 신라까지 무사히 들어와 미추왕을 만났다. 미추왕은 공주를 안내해 온 아도의 인품과 늠름한 모습에 이끌려 궁궐에 머물게 했지만 생소한 불교에 대해서는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았다.그러던 중 성국공주가 병이 들었는데 용하다는 무당과 의사들도 고치지를 못하자 미추왕이 전국에 방을 내려 공주의 병을 고쳐주면 후한 상을 줄 것이라 했다. 이에 아도가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려 공주의 병을 깨끗하게 고쳤다.왕이 크게 기뻐하며 아도화상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도화상은 절을 지어 불법을 전수할 수 있게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이에 왕은 궁궐 서쪽 천경림에 흥륜사를 지어 아도가 관장하게 했다.미추왕이 죽은 다음 대신들이 요상한 주문을 외운다며 아도를 몰아내었다. 아도는 이때 이미 세상에 대한 이치를 모두 터득하고, 술법을 익히고 있었지만 술법을 세상에 드러내어 펼쳐보이지는 않았다.아도화상은 이들을 피해 속림 모록의 집에서 절을 짓고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도가 절을 짓고 신라 서민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한 곳이 도화와 이화가 만발한 땅이어서 사람들은 절 이름을 도리사라 불렀다.아도화상은 이미 속세의 정리에서 벗어나 달관한 도사로 깨달음을 터득하고 있었다. 궁궐에서 끈질기게 그를 추격해오자 아도화상은 자신이 지은 도리사의 지하 석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면벽 수행하다가 그 자리에서 입적했다. 그의 앞에는 인연이 닿는 후세에 다시 오리라는 글을 남겨두고, 편안히 잠든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58) 가락국가 (하) 대가야

가야는 520년 역사를 가진 나라이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묻혀 우리의 기억에도 희미하다. 최근 고분군에서도 가야의 섬세하고 화려한 역사문화가 발견되면서 가야의 존재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다.가야는 백제와 신라, 그리고 고구려 삼국 사이에 끼어 약소국의 설움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신라에 흡수 통합되면서 가야라는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혀 잊히고 있었다.신라 진흥왕이 가야를 흡수하면서 가야의 왕족과 귀족들이 그대로 그 땅을 다스리며 신라의 일부 조직처럼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다. 때문에 문무왕이 모계 쪽으로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 15세손이라 스스로 칭했다.가야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라에 병합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지금까지 정신과 핏줄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해야 한다.◆삼국유사: 가락국가신라 제30대 문무왕이 “수로왕은 내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가 다스리던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아직 남아 있으니, 신라 종묘에 합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그리고는 사당에서 가까운 좋은 밭 30경을 주어 제사지낼 비용으로 쓰게 하고, 이를 왕위전이라 불러 본토에 부속시켰다. 왕의 뜻을 받들어 그 밭을 관장하며 여러 가지 제물을 갖춰 제사를 지냈는데 해마다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구형왕이 왕위를 잃고 나라를 떠난 다음부터 용삭원년 신유에 이르는 60년 동안에는 이 사당에 지내는 제사를 가끔 거르기도 하였다. 문무왕이 조상을 받들어 효성을 다하고 끊어진 제사를 이어서 다시 받들게 했다.신라 말년에 충지 잡간이란 이가 있었다. 금관성을 쳐서 성주장군이 되었는데 영규 아간이 성주장군의 위세를 빌어 사당에 제사지내는 것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지냈다. 단오날 사당에 고하는데 들보가 아무런 까닭도 없이 부러져 거기에 눌려 죽었다.단오날 알묘제 때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미쳐서 사당으로 달려오더니, 간원이 차린 제물을 치우고 자기의 제물을 차리고서 제사지냈다. 그러나 세 번째 잔을 바치기도 전에 갑자기 병이 나 집으로 가자마자 죽었다.옛 사람의 말에 “함부로 지내는 제사는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고 했다. 또 도적들이 “이 사당 안에 금과 옥이 많다”고 하면서 훔쳐가려고 했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에 몸에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활에다 화살을 메긴 용사가 사당 안에서 나와 사방을 향해 비 오듯 화살을 쏘았다. 7~8명을 맞춰 죽이자 나머지 도적의 무리가 달아났다. 그들이 며칠 뒤 다시 왔을 때에는 30여 척이나 되는 큰 구렁이가 눈빛을 번개처럼 번쩍이면서 사당 곁에서 나와 8~9명을 물어 죽였다.건안 4년 기묘년(199)에 처음 사당을 세운 다음부터 지금 왕이 즉위한 지 31년 되는 대강 2년 병진(1076)에 이르기까지 무릇 878년이 지났다. 그러나 쌓아올린 흙이 무너지지 않았고, 그때 심은 나무도 말라죽지 않았다. 게다가 그 안에 벌려놓은 수많은 옥 조각들 또한 부서지지 않았다.순화 2년(991)에 김해부 양전사였던 조문선이 “수로왕 묘에 소속된 전답의 결수가 많습니다. 마땅히 15결로 해서 옛 관례에 따르고, 그 나머지는 김해부의 역정들에 나눠주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조사 보고했다.그때 조정에서 “하늘에서 내린 알이 성군으로 변하여 왕위에 올라 158세나 되었으니 저 삼황 이후로는 어깨를 겨룰 자가 드물다. 왕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선대로부터 사당에 전답을 소속게 했는데 지금 줄인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라며 왕의 뜻을 전했다.양전사가 거듭 아뢰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맞다고 여겨 반은 능묘에 두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나머지 반은 김해부에 부역하는 호정들에게 지급했다. 그 이후 어느 날 양전사의 꿈에 7~8명의 귀신이 밧줄과 칼을 들고 나타나 “네가 큰 죄를 지었으니 죽여야겠다”며 꾸짖었다.양전사가 형벌을 받는 줄 알고 괴로워하다가 깜짝 놀라 깨었다. 그리고는 이내 병이 들어 밤중에 달아나다가 병이 심해져서 관문을 지나다 죽고 말았다.가야는 수로왕이 건설해 아들 거등왕, 마품왕, 거질미왕, 이시품왕, 좌지왕, 취희왕, 질지왕, 겸지왕을 거쳐 10대 구형왕 42년 임오년(562)에 신라에 항복하며 나라가 없어졌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야는 멸망하지 않았다신라 진흥왕은 7세에 왕위에 올라 18세부터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하게 되면서 정복군주로 탈바꿈했다. 정복군주로 나설 때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던 장군 이사부와 손잡고 가야를 합병하고 백제, 고구려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기 시작했다.진흥왕은 친정체제에 접어들어서도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에 휘둘리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서히 주변 세력들을 교체하기 시작했다. 가장 깊숙이 손을 잡은 세력이 가야국의 왕족들이다. 가야 구형왕의 맏아들 노리부는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며 특히 무술을 잘하는 용맹스런 장수였다.진흥왕은 항상 노리부를 자기 옆에 두고, 국정을 살피는 일이나 정복전쟁에 나설 때도 노리부와 함께 했다. 병부령에서부터 가야의 귀족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기존 귀족층들을 견제하게 했다.미실이 진흥왕의 힘을 등에 업고, 뒤로는 거칠부와 손잡고 진지왕을 옹립했다. 이때 노리부는 한발짝 뒤로 물러나야 했다. 진지왕이 여색에 빠지고, 거칠부가 상대등에 올라 실권을 휘두르자 미실은 노리부를 불러들여 다시 진지왕을 몰아내고 진평왕을 옹립했다.노리부가 직접 실력행사를 통해 거칠부를 제거하고, 진평왕을 옹립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해 상대등에 올랐다. 노리부가 진평왕을 옹립한 것은 미실의 영향도 있었지만 진흥왕이 일찍부터 가야 왕족들을 가까이 하며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보살핌에 대한 은혜를 깊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야는 멸망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가야의 중심인물들은 신라에 흡수되어 신라를 더욱 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로 성장 발전시키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김유신 장군도 노리부의 손녀 사위이자 가야 출신인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