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01>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

의상(625~702)은 원효(617~686)와 함께 신라의 불교를 꽃피운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다.의상과 원효는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종교인이면서 사상가이자 철학자, 정치인이며 성인으로 손꼽힌다.의상과 원효는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고승으로 전해지며 기록이 남아있는 국제적인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의상은 중국에서 지엄으로부터 화엄종을 배워 신라에 그 뿌리를 내렸다.원효와 함께 불교의 대중화를 꽃피우는 일에 앞장섰다.이 때문에 전국의 오래된 사찰치고 의상과 원효의 이름이 없는 사찰이 없을 정도다. 원효와 의상 두 성인 모두 낮은 자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며 부처의 길을 안내했다.원효가 스스로 실천적으로 민중과 함께 살다간 수행자라면 의상은 실천적 불교에 힘쓰면서 제자들을 길러 제자들이 전국 십대사찰에서 불교를 전파하게 한 교사적 성인이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의 입적과 시기를 같이해 중국이 대대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신라로 돌아와 왕실에 이러한 사실을 알려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호국승려이기도 하다. 의상은 양양의 낙산사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탁월한 십대제자를 길러내 신라의 불교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워 국사, 법사, 대사 등으로 불린다. ◆삼국유사: 의상이 화엄종을 전하다의상법사의 아버지는 한신이며, 성은 김씨이다.나이 스물아홉에 서울의 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 부처의 교화를 보고자 해,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다가 국경의 수비군이 간첩으로 오인해 수십 일 동안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영휘 초년(650)에 때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 배에 편승해 중국으로 들어갔다.처음에 양주에 있었는데 양주의 장군 유지인이 청해 의상을 관청 안에 머무르게 하며 융숭하게 대접했다.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를 찾아가 지엄을 만났다.지엄이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신라 지역에 나서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와 중국까지 덮었는데 나무 위에는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에서 나온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청소를 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바로 도착하는 것이었다.극진한 예절로 그를 맞이하면서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어제 꾼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 하면서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의상이 화엄경의 오묘한 뜻을 그윽하고 미묘한 데까지 해석하니, 지엄은 학문을 서로 이야기할 동반자를 만나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했다. 이때 이미 본국의 승상 김흠순(인문이라고도 한다)과 양도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갇혀 있었는데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정벌하려 하자 흠순 등이 남몰래 의상에게 권유하여 먼저 돌아가게 했다. 의상이 함형 원년 경오(670)에 귀국해 이 일을 조정에 알리자 신인종의 고승 명랑을 시켜 임시로 밀교의식을 행할 단을 세우고 비법으로 기도하니, 국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의봉 원년(676)에 의상이 태백산으로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을 널리 펴자 영험스런 감응이 뚜렷이 나타났다. 종남산 지엄의 제자였던 현수가 수현소를 지어 그 부본을 의상에게 보내면서 은근한 뜻이 담긴 편지도 함께 보냈는데 글은 이러하다. ‘서경의 숭복사 중 법장이 해동 신라의 화엄법사님의 시종을 드는 분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번 작별한 지 20년이 됐으나 사모하는 정이 어찌 마음과 머리에서 떠나겠습니까? (중략)’ ‘우러러 받들건대 스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신 후 화엄경을 강연해서 법계의 끝없는 연기를 드날리시고 겹겹의 제망으로 불국을 새롭게 해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뛸 듯이 깊어집니다. (중략)’ ‘분수에 따라 전수받아 가진 것을 버려둘 수도 없어서 이 공부에 의지해 내세의 인연을 맺게 되기를 원할 뿐입니다.다만 스님의 주해가 뜻은 풍부하나 글이 간결해 후세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그래서 스님의 은미한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를 만들었습니다. 근래에 승전법사가 옮겨 써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오니 스님께서는 좋고 나쁜 점을 상세히 검토하시어 경계해야 할 바와 깨우쳐야 할 바를 가르쳐 주시면 다행으로 여기겠습니다. (중략)’ ‘인편과 서신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제대로 쓰지 못하였습니다.’의상은 이에 10여 곳의 사찰로 불법을 전하게 하니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남악의 화엄사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과 약소를 지으니 일승의 중추가 되는 요점을 모두 실어 천년의 귀감이 되게 했으므로 여러 사람이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었다.이 밖에는 저술이 없지만 솥 안의 고기 맛을 보는데 한 점의 고기로도 충분할 것이다.법계도서인은 총장 원년 무진(668)에 완성됐으며 이 해에 지엄도 입적했으니 이는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놓은 것과 같다. 세간에 전해지기로 의상은 바로 부처의 화신이라 한다. 그의 제자인 오진, 지통, 표훈, 진정, 진장, 도융, 양원, 상원, 능인, 의적 등 열 명의 높은 경지에 도달한 승려들이 우두머리가 됐다.그들 모두가 성인과 버금가며 각자 전기가 남아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의 골암사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 팔을 뻗쳐 부석사의 석등에 불을 켰다.지통이 추동기를 지었는데 직접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그의 글에는 오묘한 경지에 이른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머물면서 항상 천궁을 오갔다.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여러 사람들이 함께 탑을 돌면서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층계를 밟지 않았기 때문에 그 탑에는 사다리와 돌계단을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계단에서 3자나 떨어져서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그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본다면 필시 괴이하다고 여길 터이니 세상에 가르칠 것은 못 된다”고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과 선묘의상이 당나라 유학길에서 선묘 낭자를 만났다.선묘는 의상의 인물됨에 한눈에 푹 빠져버렸다.그러나 이미 불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의상과의 세속적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 선묘는 그냥 의상의 옆에서 머물기로 작심하고 그를 돌보며 어디든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상이 고국 신라의 위험을 알아차리고, 중요한 정보를 들고 선묘에게 작별인사도 없이 신라로 떠나는 배에 올라버렸다.의상이 신라로 떠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선묘는 용이 돼 뒤따르며 풍랑을 잠재워가며 의상의 뱃길을 인도했다. 의상이 신라에서 국왕을 만나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낱낱이 보고했다.이어 낙산으로 올라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부처의 뜻에 따라 낙산사를 건립했다.또 신라 국왕의 명을 받아 영주 부석사를 건립했다. 부석사에서 불법에 매달리는 의상을 보살피기 위해 선묘는 용이 돼 밤이면 암자에 운무를 드리우고 지붕에 똬리를 틀어 도적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하며 의상을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선묘는 밤이 늦도록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외우는 당당한 자세의 의상을 보다가 그만 넋을 잃어버렸다. 선묘의 눈에는 의상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낭군이었다. 그날따라 의상의 모습이 너무나 예쁘게 보여 그만 참지 못하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의상도 그날따라 선묘를 내치지 않고 포근하게 안아줬다. 선묘는 그만 황홀경에 빠져 극에 이르는 기쁨을 맛보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다가 벽에 머리를 꽝 부딪치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지만 생생한 느낌이 전신에 남아 있었다. 선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다. 선묘의 품에는 의상의 목침이 안겨있고, 어깨 위에는 그의 도포가 덮여있었다. 의상은 꼿꼿한 자세로 아미타불 앞에서 여전히 염불을 암송하고 있었다. 선묘는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덮고 있던 의상의 도포를 곱게 개켜 두고는 지붕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선묘는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낭군님은 이미 불가의 제자다. 임의 공부에 방해가 돼서는 아니 된다. 나를 다스려야겠다’고 재차 다짐한 선묘는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로 바꿔 버렸다. 스스로 욕심을 억제하고, 임의 옆에 머물며 돌볼 수 있는 부석이 돼 천 년 만 년 대사의 옆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팔우정공원에 신라 관모 조형물 설치 새로운 볼거리

경주시는 천마총 관모 조형물은 1500년 전 신라 관모를 모티브로 신라시대의 찬란했던 금속공예의 위상과 우수성을 재조명한 작품으로 지난해 9월부터 5개월 동안 제작해 최근 설치 공개하고 있다고 지난 1월31일 밝혔다.경주시와 경주문화재단이 추진한 이 사업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위축된 지역예술인들에게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시민과 관광객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일상에서 예술을 만나는 공공미술프로젝트 사업’으로 진행됐다.조형물은 높이 6.6m 폭 4.2m로 팔우정로타리에 우뚝 솟아 새로운 볼거리가 되고 있다. 조형물 내부에는 신라이야기를 테마로 한 회화작품 14점도 함께 전시해 경주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팔우정공원 인근 대릉원 돌담길 벽면의 지역작가 20명이 신라시대 유적과 유물을 모티브로 한 도자타일 작품 40점과 연계되면서 인기를 끌것으로 기대된다.경주시 관계자는 “신라천년의 귀하고 아름다운 유물문화재를 실내가 아닌 야외로 끌어내어 그 우수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역사문화도시인 우리 경주의 새로운 명물로 부상되어 경주를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5>원광법사(상)

원광법사는 신라십성에 이름은 오르지 않아도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의 조정에서조차 그의 공부를 높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신라 진평왕이 중국에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돌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의 수련지침을 마련했다.청소년들이 수련하는 지침으로 삼았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상으로 삼을 계율로 전해온다.그는 당시 중국으로 보내는 나라의 문서는 물론 왕실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삼국유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당나라의 속고승전과 수이전 두 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각각 소개했다.두 기록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와 설씨로 다르게, 또 죽음에 이른 나이도 99세, 84세로 다르게 전한다. 속고승전과 수이전에 전하는 원광법사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다.또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해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다.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도 모자라지 않았다.끝내 스물다섯 살에 친척과 벗들을 떠나 배를 타고 중국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원광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했더니 칙명으로 허락했다.이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돼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해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해 마음에 꼭 들어 했다.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다.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원광이 위기에 임해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서울로 와서 지냈다.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서울에 높이 드날렸다. 멀리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했다.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99세이니 바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었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 숲을 내달렸다.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박물관 한국 고대유리와 신라 특별전

국립경주박물관이 내년 3월1일까지 특별전시관에서 ‘오색영롱, 한국 고대 유리와 신라’ 특별전을 개최해 유리제품을 통한 신라의 역사문화교류에 대한 사실을 조명한다. 이번 특별전은 한국 고대 유리를 주제로 한 유리제품 1만8천여 점을 전시하는 최초의 대규모의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전시품에는 경주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봉황 모양 유리병(국보 제193호)을 비롯한 국보 3건과 보물 8건이 포함돼 있다. 4천500년 전 지중해 지역에서 탄생한 유리는 기원전 1세기 대롱 불기라는 혁신적 기법이 개발되면서 로마 제국에서 널리 사용됐다.고대 동아시아에서 유리는 서역에서 온 진귀한 보물로 여겨졌다.오색을 띠며 빛을 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며 주로 장신구에 활용됐다. 신라 능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유리그릇은 매우 놀랍고도 이례적 사례이다.이제까지 7개의 능묘에서 제대로 형태를 갖춘 유리그릇으로는 15점이 발견됐는데, 특히 황남대총의 경우 8점에 이른다.황남대총의 유리는 세계 다른 지역의 유리보다 보기 드물게 아름다우며 다채로운 색과 기형을 보여준다. 최근 조사를 통해 유리제품의 생산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게 됐다.이집트, 시리아-팔레스타인, 코카서스 산맥 이남, 중앙아시아 등 다양한 곳에서 만들어 졌을 거라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육로와 해로를 통해 신라로 전해진 유리그릇은 신라인의 국제적 감각, 높은 심미안, 특별한 취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더불어 이번 특별전에서 고대 유리의 유형 중에서 주류를 이루는 구슬의 무궁무진한 변주를 선보인다.각양각색의 단색 유리구슬 이외에 상감이나 금으로 장식해 한층 화려한 모습을 띠는 유리구슬을 전시하고 제작방식도 설명한다.또 삼국시대 대표작을 중심으로 나라별 특색도 알려준다.예를 들어 백제의 다채로운 색, 가야의 수정과 유리의 조화, 신라의 청색 물결 등이라는 키워드로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한국 고대 유리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며 “이번 특별전은 한국 고대 역사와 유리를 둘러싼 여러 의문점의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가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전시휴식공간으로 탈바꿈

국립경주박물관이 2018년부터 3년 간 리모델링한 전체 전시의 주제관인 신라역사관을 8일 공개한다.내진설계 등을 마친 신라역사관은 안전하고 쾌적한 시설로 거듭나게 됐다. 경주박물관은 1실부터 4실까지 나누어져 있던 신라역사관을 3실로 통합하고, 남쪽 벽을 통유리로 리모델링해 안전하면서 편안한 관람시설로 꾸몄다. 신라 황금문화를 집중 조명한 신라역사관 2실을 2018년, 신라 천년의 태동을 소개하는 1실은 2019년, 삼국통일과 융성하는 통일신라 문화를 다룬 3실과 4실은 올해 하나의 전시실로 통합했다. 이번 개편을 통해 지진에 대비한 안전 강화는 물론 바닥부터 천정까지 시설 전면을 재구축해 한층 세련되고 편안한 공간으로 조성했다.또 중앙홀 공간을 확장 개선해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했다. 미로와 같던 이전의 전시공간을 한눈에 들어오는 열린 구조로 개선하고, 4m에 이르는 대형 유리 진열장을 설치해 개방감을 극대화하면서 감각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라의 중앙 집권화와 삼국 통일과정, 통일신라 문화를 다루는 기존의 신라역사관 3·4실은 보다 알기 쉽고 통일성 있는 정보를 전달하고자 3실로 통합했다.신라미술관에 있던 국은기념실을 이전해 1천200여 점의 문화재를 선보인다. 특히 신라역사관 3실은 최신의 연구 성과와 그간 축적된 신 발굴 자료를 엄선해 전체적으로 더욱 알차고 짜임새 있는 전시로 구성했다. 전시 전반부에서는 신라가 왕권을 강화하고 주변국을 복속하면서 통일을 이룩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또 신라 관등제의 성립과 신라 중앙 정부와 지방과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국보 제318호) 실물을 처음으로 상설 전시해 눈길을 끈다. 후반부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한층 발전하는 통일신라 문화를 소개한다. 신라 궁성과 왕경의 정비 과정, 당나라로부터 받아들이는 복식과 의복 등 통일신라 문화 전반을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알기 쉽게 연출했다. 진열장 유리는 모두 전면 저반사 유리(가시광선 투과율 99% 수준)를 채택해 편안하게 감상하도록 했다.이와 함께 조명도 박물관 전시에 최적화된 최신 LED로 전면 교체해 전시품 감상의 몰입도를 높였다. 경주박물관은 2016년 발생한 경주 지진 이후 관람객과 문화재 안전을 최우선으로 각종 면진 성능 개선 사업을 마쳤다.이를 통해 전시실은 규모 8.0의 지진에도 전시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신기술을 도입했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박물관 본래의 가치를 지키고, 관람객과의 소통의 폭은 더 넓히기 위한 국립경주박물관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신라천년의 왕궁 경주 월성 야간에 무지개궁궐로 변신

신라 천년의 왕궁터 경주 월성이 무지개 조명 설치로 야간에 화려한 궁성으로 부활한다.월성의 야경 조성으로 월성 일대의 동부사적지가 새로운 야간 문화관광 유적지로 떠오를 전망이다. 경주시는 월성의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월성 북동쪽 400m 구간에 경관조명 개선사업을 시행해 야간에 월성을 무지갯빛으로 환하게 밝혀 새로운 야간문화관광자원으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월성 구역에는 2004년부터 2년간 월성 북편 1.1㎞ 구간에 경관조명등 280개가 설치됐었다.하지만 15년이 지나자 조명등 노후화로 인해 전체 조명등의 1/3 가량만 점등되며 나머지는 빛을 잃었다.또 이로 인한 전기 안전사고의 위험이 높아 교체해야 한다는 민원이 이어졌다. 이에 따라 경주시는 월성 경관조명 개선사업으로 아름답고 깨끗한 사적지 환경을 조성하기로 하고 조명등과 음향시설 개선작업에 나섰다.2억5천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기존 방전등을 친환경 에너지 절약형 LED 풀 컬러 조명등으로 교체하고 원격 조명제어시스템과 음향설비 등을 구축했다. 기존 설치된 배관과 배선을 최대한 활용해 공사비를 절감한 것.또 조명연출이나 표출시간을 원격으로 조정이 가능하도록 해 조명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월성의 야간 경관조명은 일몰 후 월성의 고즈넉한 정취와 어울리는 은은한 무지개 칠색의 불빛으로 연출된다.매시 정각부터 10분간은 ‘월성의 사계’와 ‘신라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한 화려한 조명과 다채로운 음악이 어우러지는 ‘조명쇼’가 펼쳐져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는 최근 경주의 야경을 대표하는 동부사적지 일대에 다양한 경관조명등을 설치하고 있다.지난해 첨성대에 팔색으로 변신하는 조명시설을 설치해 SNS 등에서 이색적인 볼거리로 소개되고 있다.지난달 계림숲의 야간조명등 설치에 이어 월성까지 무지갯빛으로 야간조명시설을 설치해 동부사적지 일대가 유명 야간관광자원으로 떠오른 것.경주시는 이번 월성 경관조명 개선사업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볼거리를 선보여 월정교~계림~첨성대~월성~동궁과 월지로 이어지는 구간이 문화재 야간관광의 핫 플레이스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시민과 관광객이 야간에도 천년고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도록 야간 경관조성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놓인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겠다”고 말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서예원 ‘석비’

구름이 지구를 수백만 번 감고 돌았으리라,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사계절은 또 몇 번이나 오고 갔을지 모르겠다. 시간이라는 감각이 없어지고 주변의 풍광이 생경할 정도로 바뀌어갈 즈음, 낯선 두려움에 얼굴이 사색이 되어도 꿋꿋이 돌 위의 글씨를 붙잡고 버텨온 것이었다.깊은 땅에 거꾸로 처박혀 있어서 숨이 안 쉬어질 때면,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예전 기억을 떠올렸으리라. 본인의 몸통에 아로새겨진 그때의 기록을 품고, 다시 빛 볼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1988년 추운 겨울에서야 땅속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니, 잘 견뎌냈다고 혼잣말을 내뱉어보았다.처음 만난 세상은 참으로 이질적인 시공간이었을 터. 기뻐할 새도 없이 포클레인으로 온몸이 들려져 길옆 개울에 무참히 버려지는 수모를 겪었다고 했다. 그러나 영겁의 세월 동안 돌 몸통에 끝까지 붙들어두어 잃지 않았던 글씨들 덕분에, 마침내 그 가치를 증명해 내기에 이르렀다.석비는 모든 수고로움을 의연히 견뎌내어, 새로운 시대에 빛을 보았다. 당대에는 이름 없는 비석이었을지 모르나, 현대에는 과거 신라의 역사와 발자취를 좇는 사람들에게 ‘울진 봉평리 신라비’라는 새 이름을 부여받았다. 신라 법흥왕 시대에서 21세기 대한민국으로, 그렇게 새 삶을 살게 되었다. 새겨진 기록은 단순하지만 그 기록이 말해주는 당시 시대상 덕분에, 이 석비는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다.비석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신라시대 비석들을 공부하면서부터였다. 그중에는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세운 비석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진흥왕이나 법흥왕처럼 왕으로 태어나 특별한 업적을 세우며 살진 않았을 테니.울진 봉평리 신라비도 그 관심의 일부였다. 석비 발견 계기를 읽고 그 보존도 단순하게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방문해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전시관이 있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 안에는 고비(告碑)와 함께,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을 특종으로 다룬 옛 신문기사도 전시되어 있었다. 획기적 사료라는 헤드라인에서 당시 사람들의 흥분과 떨림이 전해져왔다.신라 법흥왕 때 울진 지역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이들에 대한 처리와 형벌에 대해 회의하고 형벌을 집행한 내용이다. 현대로 치면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기록해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석비를 통해 그 시대의 그 삶을 본다. 그 시절에도 제도를 갖추고 법을 집행하면서 온전한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었음을 본다. 다시 돌 위에 간신히 남아 매달려 있는 글자들을 보았다. 바람과 물과 시간이 앗아가려 한 과거의 삶이 명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니, 새삼스럽게 엄숙해졌다.전시관 안 중앙에 보존되어 서 있는 그 위용을 한참 바라보았다. 발견된 날짜를 생일로 하면, 나보다 10개월 늦게 태어난 석비였다. 4면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아 땅 위에 제힘으로 온전히 발붙이고 서 있기 힘들어 보이긴 했으나, 중심은 잘 유지하고 있었다.감탄이 나왔다. 종이는 찢어지고 물에 젖고 불에 타서 영속성이 떨어진다. 돌은 다르다. 엄청난 충격으로 산산조각 나지 않는 이상, 제 모양을 유지한다. 오죽하면 바람도, 물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천천히 돌의 표면에 흠집만을 내지 않던가.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비석도, 문명도, 참으로 위대하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글자라는 도구로 천 년 후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는 까닭이다.‘우리가 살던 세상은 이런 모습이었어. 거기는 어때?’바람은 불고, 물은 흘러갔다. 사람은 생과 사를 반복하고, 시대는 변해왔다. 높이 204㎝의 공간에 거벌모라의 숨결을 그대로 담은 채, 비석은 그 오랜 생을 달려온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을.우리 사이에는 긴 시간이 있지만, 그 시간도 바로 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건, 1천500년을 살아낸 이 비석 덕분이다. 현재는 과거의 연장선상에 놓인 결과이며, 결국 역사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신라인들도 우리보다 조금 일찍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 뿐. 결국 우리는 사는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고 삶과 애환을 공유하는 같은‘인간’임을, 이 석비(石碑)를 통해 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경주문화재야행으로 신라의 달밤 즐기고 누리자

코로나19 여파로 연기된 경주문화재야행 행사가 30일부터 11월1일까지 오후 5~10시 월정교와 교촌마을 일대에서 열린다.경주문화원은 경주시가 개최하는 경주문화재야행은 전통문화를 오늘날의 문화예술 형태로 발전시켜 관광활성화를 이끌고자 마련된 사업이다. 야행이 열리는 월정교와 교촌 일원은 신라와 조선의 역사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이곳에는 신라 시원인 계림, 신라궁성 월성, 왕릉과 고분들이 있는 동부사적지, 월정교지, 춘양교지 등의 문화재가 널려 있다.또 보물 경주향교 대성전, 국가민속문화재인 경주 최부자댁을 비롯해 사마소 등 신라와 조선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경주시와 경주문화원은 이 공간에서 야로, 야설, 야화, 야사, 야경, 야시 등의 일곱 개 주제로 크고 작은 다양한 행사를 연다. 행사는 ‘신라설화 인형극’, ‘교촌 달빛 버스킹’, ‘무형문화재 풍류마당’과 달밤에 여성들이 손에 손잡고 부르는 ‘월월이청청’ 등으로 진행돼 야행의 분위기와 흥을 돋운다.대성전 뜰에서 별을 보는 ‘신라의 밤 천체관측’, ‘신라복 체험’, ‘청사초롱 만들기’, ‘십이지 소원지 달기’, ‘아트 마켓’, ‘최부잣집 곳간을 열다’ 등도 펼쳐진다. 올해는 코로나 상황을 감암해 인터넷 사전 신청 300명으로 제한해 접수했으며 현재 예약이 완료됐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시 ‘이사금쌀’ 신라 임금 밥상 위 울리듯 관리 나서

경주시가 신라 임금이 먹던 ‘이사금쌀’ 브랜드화 및 소비촉진을 위한 정책개발을 추진한다.특히 이사금쌀에 대한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사반을 운영하는 등 생산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24일 경주시에 따르면 이사금쌀 품질 보증을 위해 지난 21일부터 다음달 7일까지 모든 필지에 대한 포장 심사를 통해 품질 심사를 실시한다. 이사금쌀을 최고 품질 명품 쌀로 육성하기 위해 원료곡 생산단지인 고품질 벼 생산단지 846㏊를 2009년부터 조성, 육성하고 있다.경주 농업기술센터와 경주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 고품질 벼 생산단지 농업인 대표 등으로 포장 심사반을 구성했다. 포장심사반은 심사를 통해 포장의 균일도와 도복(쓰러짐) 등 미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중점 조사한다.경주시는 미질이 불균일하거나 이형주(같은 개체군 내에서 형질이 다른 개체)가 발생한 필지 등은 불합격 처리한다. 불합격된 필지는 수매에서 제외해 이사금쌀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로 했다.이사금쌀 재배 전 필지는 농산물우수관리인증(GAP)을 획득해 소비자가 믿고 찾을 수 있는 안전한 농산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권연남 경주농기센터 소장은 “수매된 벼에 대해 완전미 비율, 단백질 함량 등 품질검사와 쌀 DNA 분석을 실시하는 등 순도 높은 쌀만을 소비자에게 공급할 계획이다”며 “수시로 모니터링을 강화해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신라문화원 태풍 피해 문화재 복원 나서

신라문화원이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으로 파손된 문화재 피해 조사 및 복원 정비에 나섰다.이번 연이은 태풍으로 경주를 비롯한 경북 동해안에 산재한 목조건축 문화재가 집중 피해를 입었다.10일 신라문화원에 따르면 포항, 경주, 영천, 경산, 청송, 영덕, 청도, 울릉지역 지정문화재를 비롯 비지정 문화재에 대한 피해 상황을 문화재돌봄사업단 모니터를 통해 조사를 거쳐 긴급 복구를 실시하고 있다.신라문화원 경북남부문화재돌봄사업단은 전체 인력을 15개 조로 긴급 편성해 태풍이 지나간 지역의 문화재에 대한 피해 조사를 실시했다.경주 양산재 기와 탈락, 옥서정과 경산 하양향교 사당 담장 붕괴, 양동마을 내 심수정, 상춘헌 등은 담장 붕괴 피해가 발생했다. 포항 장기향교 기와 탈락, 영덕 무안박씨 벽체 탈락, 천연기념물 수림지 포항 북천수와 영덕 도천숲 나무가 쓰러지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대상 문화재 479개소 중 석조문화재를 제외한 325개소에 대한 긴급 점검을 실시한 결과 158개소의 목조문화재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경북남부문화재돌봄사업단 진병길 단장은 “지난 경주와 포항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문화재의 신속한 대처와 복구 경험을 살려 이번 태풍으로 훼손된 문화재의 빠른 복구를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코로나 여파에 경주 ‘신라문화제’ 취소

경주시가 야심차게 준비해 온 ‘제48회 신라문화제’를 코로나19 사태로 올해는 열지 않기로 했다.신라문화제추진위원회는 지난 18일 경주시청에서 긴급회의를 열어 이 같이 결정했다.60년 전통의 신라문화제는 오는 10월8일부터 14일까지 황성공원과 시가지 일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신라문화제 추진위는 “1962년부터 개최해 온 대한민국 대표 역사문화축제이며 종합예술제인 신라문화제를 정부의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내년에 순연 개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이에 따라 내년에 개최될 신라문화제는 올해 선정한 주제와 기획한 킬러콘텐츠 행사를 그대로 연계해 추진한다. 이미 설치된 신라문화제 시설물인 사로6촌의 원두막과 120m에 달하는 박 터널은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기로 했다.주낙영 경주시장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신라문화제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열리지 못해 매우 아쉽다”며 “내년에 여는 행사는 더욱 풍성하고 알찬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겠다”고 말했다.한편 지난해 열린 ‘신라문화제’에는 53만여 명이 관람하는 등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축제로 인정받아 한국소비자협회 주관 대한민국 명가명품 대상을 수상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신라대종 타종하고 더위 날리며 소원 빌어요

경주시가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을 그대로 복제한 신라대종 타종 체험을 경주시민과 관광객에게 제공한다.경주시는 12일부터 현존 최대의 거종인 성덕대왕신종을 재현한 신라대종을 시민과 관광객이 직접 타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매일 낮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 정각에 체험관에 비치된 신라 복을 착용하고 한 팀당 최대 3번의 종을 칠 수 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신라복 착용은 하지 않는다. 경주시문화관광 홈페이지 상단의 ‘신청하기’에서 사전 접수를 하면 신라대종을 타종할 수 있다.신라대종은 국보 제29호인 성덕대왕신종을 현대적 기술로 3년에 걸쳐 재현한 성덕대왕 복제품이다. 2016년 완성해 3·1절 기념, 제야의 종 행사 등에서 타종하다가 이번에 시민과 관광객에게 타종 체험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신라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정신과 가치를 재현하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높이 3.66m, 평균 두께 20.3㎝, 무게 20.17t 규모로 성덕대왕신종과 같게 주조했다.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신라 문화를 집대성한 최고의 걸작 성덕대왕신종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신라대종 타종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4> 가섭불연좌석

삼국유사 9편 중 네 번째가 탑상편이다. 탑상은 30여 꼭지의 탑과 불상에 대한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탑상편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가섭불연좌석이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의 일곱 부처 중 여섯 번째 부처로 석가모니의 스승이라고도 전한다. 가섭불연좌석은 가섭부처가 앉아 참선하던 자리라는 뜻이다. 황룡사에 가섭불이 참선하던 자리가 있다고 일연스님이 소개한 것이다. 신라는 불교와 일찍부터 인연이 지어진 땅이다. 석가모니 이전부터 칠불이 신라 일곱 곳의 절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금당의 주춧돌이나 불상을 떠받치고 있었던 대좌, 탑의 기초석과 같은 석물들에서 지나간 시대의 일들을 유추해 볼 뿐이다. 가섭불연좌석 또한 삼국유사 기록이 남긴 오랜 시간 이전의 사실들을 더듬어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 어떠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일까. 한 겹씩 벗겨보는 학자들의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불가사의한 이야기, 가물가물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희미하게 남은 흔적에서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의 연좌석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본다.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서 모두 “신라 월성 동쪽의 용궁 남쪽에 가섭불 연좌석이 있다. 이 땅은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절터였다. 지금 황룡사 땅은 곧 일곱 절터 중 하나”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은 계유년(553)인데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의아하게 여겨 황룡사로 고쳐지었다. 연좌석은 불전의 뒷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한번 뵌 적이 있다. 돌의 높이가 대여섯 척은 되고, 둘레가 거의 세 주쯤 되는데, 깃대처럼 우뚝 서 있고 이마 부분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지은 다음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는 깨진 곳이 있었다. 절의 승려가 철을 발라 보호하고 있었다. 찬한다. 지나온 부처님의 시대 다 적지 못하나/ 오직 연좌석은 남아 의연하구나/ 뽕나무밭은 몇 번이나 바다로 변했던가/ 외로이 우뚝 서 상기도 변함없네. 얼마 후 몽고군의 침략을 받은 다음 불전과 탑은 타버렸고, 이 돌 또한 매몰되어 거의 땅 높이와 비슷해졌다. 아함경을 살펴보자. “가섭불은 현겁의 세 번째 부처님이시다. 사람 나이로 2만세 때에 세상에 나타나신다.” 이를 근거로 증감법을 가지고 계산해보자. 성겁의 처음에 매번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사셨다. 점점 줄어서 나이가 8만세에 이르렀을 때가 주겁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백년에 1세를 줄여 10세를 누리셨을 때 1감이 되며, 또 늘어나 사람의 나이 8만세에 이르렀을 때 1증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감과 20증이 1주겁이다. 1주겁 가운데 1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다. 지금 우리 스승 석가는 네 번째 부처님이시다. 석가세존부터 지금 지원 18년 신사년(1281)까지는 세월이 벌써 2천2백30년이다.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만 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조정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었는데 “금나라 정우 7년 기묘년(1219)으로부터 거꾸로 세어서 4만9천6백여 년에 이르면 반고가 개벽한 무인년이다”라고 했다. 여러 경전을 살피건대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이 돌의 수명이다. 그러나 겁초 개벽할 때부터 시간에 비하면 어린애다. 세 사람의 설명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개벽설에 대해서 몹시 소홀했던 것 같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신라 눌지왕 때 왕궁의 동쪽에 용궁사라는 절이 있었다. 용궁사 앞뜰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고, 황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절의 주지는 가섭이라는 스님으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도인처럼 생긴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가섭은 평소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상적인 대화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며 상대를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가섭은 낮에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절 뒤편에 사람 키 높이의 돌기둥 위로 올라가 날이 밝을 때까지 참선에 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또 어떤 날은 3일 밤낮으로 석주에서 기도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가섭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그에게 지도받으려는 승려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궁사는 서라벌의 백성들은 물론 국내외에서 몰려드는 사람으로 북적거리며 서라벌의 중심이 되자 왕실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바다 건너 천축국에서 여러 승려들이 용궁사로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중 귀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며 기이하게 생긴 싯달타라는 승려가 있었다. 싯달타는 가섭과 문답을 시작하면 하루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몰입했다. 그가 후에 부처가 되었던 석가모니다. 눌지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백제와 왜는 첩자를 보내와 정탐하며 수시로 국경을 침범해 오는 통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용궁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자 왕궁에서는 백제 등의 첩자들이 활동하는 근거지가 될 것으로 우려해 감찰부에서 조사를 했다. 사실 용궁사에는 백제와 왜의 첩자들이 승려를 가장해 숨어들어 활동하고 있었다.가섭은 왕궁에서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자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백제와 왜에서 오는 첩자들을 선별해 왕궁에 은근히 밀지를 넣어 알리기도 했다. 가섭은 또한 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신라를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끝내 왜의 첩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왕궁의 군사가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왜의 첩자 긴모리와 언쟁 끝에 조사하던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실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전국의 사찰을 모두 문을 닫게 명령을 내렸다. 신라에 일곱 군데서 운영되고 있던 절이 모두 산문을 닫고 폐사에 이르렀다. 용궁사의 문도 굳게 닫혔다. 가섭은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궁사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섭불연좌석만 벌판 가운데 우뚝 서서 절이 있었던 곳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가섭불연좌석은 그냥 두었다. 승려들과 불교를 공부하던 신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신라의 불교는 반짝 번창하려다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불교의 씨앗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신라 금교, 경주 ‘황금대교’로 재탄생

황금도시 신라의 ‘금교’가 역사문화도시 경주의 ‘황금대교(黃金大橋)’로 부활한다.경주시는 서천을 가로 질러 황성동과 금장리를 연결하는 가칭 ‘제2금장교’ 명칭을 지역의 문화적 전통과 현대적 이미지를 반영해 황금대교로 결정했다고 28일 밝혔다.경주시는 이를 위해 지난 4월27일부터 5월11일까지 교량 명칭 공모를 실시했는데 총 317건이 접수됐다.경주시 지명위원회는 지난 22일 열린 심의에서 ‘황금대교(黃金大橋)’를 의결, 선정했다. 앞으로 경북도 지명위원회와 국가지명위원회 등 절차를 거처 공식 명칭으로 최종 결정한다.황금대교는 황성동과 현곡면 금장리, 나원리를 연결하는 폭 20m, 연장 370m의 대형교량이다. 총사업비 410억 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올해 내 착공이 목표다.주낙영 경주시장은 “황금대교는 황성동과 현곡면의 금장리를 연결하는 다리를 의미한다. 골든시티 경주(신라)의 명성 부활을 상징하게 된다”며 “삼국유사에서 언급된 ‘금교’라는 명칭을 되살리는 다양한 의견과 문헌자료 확인 등을 통해 의결된 명칭”이라고 설명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9) 흥륜사 금당십성-아도화상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칠처가람이 일어나 많은 고승이 활동하는 불법(佛法)과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신라가 불교와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는 것은 칠처가람으로 우선 설명이 된다.전법시대의 사찰 흥륜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담엄사, 천왕사 등의 칠처가람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신라의 불교를 크고 깊게, 널리 알려 융성하게 일으켰던 고승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다. 고승들이 행한 놀라운 이적들은 기록으로 또는 입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들과 관련된 유명사찰도 신라의 터 곳곳에 위치하고 있거나 사라지고 없어도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더듬어 보게 한다.신라의 고승 중에도 최초의 국찰로 전해지는 흥륜사의 금당에 벽화로 그려져 있었던 열명의 고승, 신라 십성으로 불리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이번 호에서는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과 안함을 만나본다.◆삼국유사: 흥륜사의 금당 십성동쪽 벽에 경(庚)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서쪽 벽에 갑(甲)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신라의 고승: 아도화상과 안함-아도화상: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로 전해지는 아도화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도는 아두라고도 불리며 고구려에 순도가 처음 불교를 전하고 2년이 지난 시기에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다.또 그의 국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눌지왕 때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따르는 승려 3명과 지금의 구미지역 모례의 집에서 머물다 죽었다고도 전한다.이어 삼국유사에서 아도는 고구려의 사신이 신라에 와 머물며 신라의 여인과 사이에 탄생해 16세에 고구려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 불교를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아도가 불법을 전파하다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펴지 못하고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들어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구미시 해평면에는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리사가 있다. 도리사는 아도가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에 절을 지어 그렇게 부른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도리사에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아도화상의 석상, 사적비, 탱화, 세존사리탑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아도화상의 석상은 높이 1m에 이르는 입상으로 윤곽이 뚜렷하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에서는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외에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바위로 전해지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좌선대,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이라는 금수굴 등이 있다.-안함(安含)은 신라의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전히 귀족들의 세력에 따라 나라의 정책이 운영되던 진지왕시대에 태어나 왕권안정을 찾아가던 진평왕 시대를 지나 선덕여왕 9년에 입적한 고승이다.안함은 흥륜사 십성 중의 한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고승 혜숙과 함께 이포진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만나 뜻을 전하고 대흥사에 머물렀다.중국에서 십성에 이르게 한 비법과 현의와 진문을 5년 동안 배우고 605년에 우전국의 비마진제, 농가타 등의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했다. 신라에 서역의 승려들이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안함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했는데 승려 담화가 이를 필수했다. 저서로는 견문록 참서(讖書) 1권을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1권을 저술했는데 그가 안홍(安弘)이라는 설도 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의 환생-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거짓 항복한 신라 장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아도는 신라에 태어나 그 신라 장군의 후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아도는 신라를 방문한 고구려 대신이었던 아버지 힘을 빌려 신라에서 다시 태어났다.그러나 아버지 아굴마가 고구려로 돌아가 버리자 어린 아도를 돌봐줄 힘이 부족한 어머니에게서 제대로 무술수업을 받지 못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아도는 먹고살기에도 어려워 겨우 글을 깨치는데 급급할 정도였다.어머니는 아도가 답답해하자 16살이 되던 해에 고구려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 뜻을 펼치라고 주문하며 아버지와의 약조와 증표를 전해 주었다.-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고구려 조정의 중요인물로 성장해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 아도는 어렵게 아버지 굴마를 만났다.굴마는 아도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아보고 이름이 높았던 현창화상에게 아도를 보내 불법을 공부하게 했다. 아도는 삶의 참 이치를 깨달으며 복수에 대한 마음을 까마득히 잊고, 백성들의 깨우침을 인도하기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고구려에서 5년여 불법에 대한 공부를 익힌 아도는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아도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버지와의 만남과 공부한 내용을 낱낱이 전하고 신라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알렸다.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아도는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전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에 대해 어두웠던 궁중에서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오히려 배척하고, 아도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휘말려 오히려 핍박하게 됐다.그러던 중 왕비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왕은 전국에 방을 내려 왕비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는 3년간 세비를 면해주고, 큰 집을 하사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용하다는 의원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아도가 궁으로 들어가 왕비의 병을 고쳤다. 아도는 고구려 현창화상에게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도력에 대해서도 배움을 얻어 이미 도력이 뛰어나 그가 마음먹은 일은 작은 산이라도 가볍게 옮길 수 있었다.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었지만 왕의 후의에 반해 귀족들은 여전히 불교와 아도화상을 업신여기며 불교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도는 신라 궁궐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던 꿈을 포기해야 했다.궁궐에서 사당을 지어놓고 선대왕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일을 담당하던 세력의 핍박은 노골적이어서 아도가 견디기 어려웠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아도는 궁궐에서 도망해 구미로 발길을 옮겨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곳에 도리사를 짓고 암암리에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끈질긴 신라 귀족들의 불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아도는 후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승려로 환생해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을 다짐하며 굴을 파고 입적에 들었다.-원효로 환생: 아도는 원효로 환생했다. 처음 화랑이 되어 전쟁터를 전전하며 장군으로 눈길을 끌게 됐다. 그러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갑옷을 벗은 원효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전생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기로 했던 뜻을 생각해내고 불법공부에 매진했다. 아도는 고구려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의상을 대동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구속되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화쟁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아도는 삼생에 거쳐 그리던 불법을 만천하에 전하는 일을 해내는 훌륭한 승려로 후대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