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대통/정명희

/정명희 설레는 날이라는 설날이 지났다. 한 살 더 먹었으니 왠지 달라져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찬바람이 뺨에 닿아도 머지않아 봄이 찾아오리라 생각하니 기분마저 상쾌해진다. 타이어의 신선함을 마음으로 가늠하며 출근길에 오른다.설날 당직 근무를 서던 때가 떠오른다. 고향 앞으로 마음부터 달려가는 명절이지만, 누군가는 아파서 급하게 병원을 찾게 되지 않던가.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시민의 병원’인 공공병원인지라 명절 연휴에 문을 열기로 했다. 명절이면 환자들이 많이 찾게 되는 내과와 소아청소년과가 설날 당일 오후와 설 이튿날 오전 진료하기로 했다. 배탈과 열나는 환자들의 치료를 도와주기로 하다 보니 누가 근무할 것인가를 두고 상의해야 했다. 그 순간 문득 올해는 가장 오래 근무한 내가 자원해서 근무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일찍 차례를 올리고 식구들과 세배하고 나서 얼른 정리하고 나오면 되지 않으랴. 거의 평생 한 직장에서 근무하였던 선배였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 듯 생각되기도 하였고 또 나를 찾아와 명절에도 집에 못 가고 누워있는 환자들에 대한 예의인 것도 같아 혼자 그리 마음먹었다. 그러자 후배 동료들은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하려 하느냐. 반나절씩 나누어서 근무하면 좋지 않으냐. 여러 가지 안이 오갔지만, 이번만은 무조건 ‘근무하는 사람은 근무!, 쉬는 사람은 눈감고 푹~! 쉬기’로 하자고 우겼다. 설날 새벽, 비행기가 연착되었다며 명절 쇠러 오는 아이들의 도착이 지연되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린 것이 새벽 4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 눈이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얼른 잠자리에 들도록 이것저것 챙겨주고는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 후 아침 일찍 일어나 차례를 지내고 근무를 위해 얼른 나섰다. 차를 몰고 병원으로 오는 길이 왠지 자꾸만 울퉁불퉁해 보이는 것이 몸에 피곤이 쌓인 듯해 창문을 내리고 찬바람을 들이켰다. 초록으로 바뀌는 신호를 보며 차를 몰아 코너링하는 찰나, 쿵~! 바퀴가 도로의 턱에 닿는 것이 아닌가. 매일 같이 다니는 길을 급한 마음에 너무 붙여서 돌았던 모양이었다. 핸들을 빠르게 풀어 바로 하며 주차장으로 향하였다. 환자들이 몰려올 것 같은 마음에 살필 겨를도 없이 내려 가운을 입고 진료를 시작했다. 배 아픈 환자, 머리 아픈 아이, 구토 설사에 눈이 빠끔해진 이들을 진료하며 오후 시간이 어찌 갔는지 모르게 흘렀다. 마지막 환자를 보고 나서니 벌써 사위는 깜깜해져 있고 싸늘한 기운이 뺨을 때렸다. 집에 기다릴 나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차의 속도는 나지 않고 덜커덩덜커덩! 무언가 둔탁한 것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차를 세워서 살펴야만 하는데 도로에는 명절이라 차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 세울 수가 없다. 한참을 그런 모양새로 달려 한적한 곳에 세우고 내려서 보니 조수석 뒷바퀴 옆면이 찢어져 속이 보이고 완전히 짜부라져 있는 것이었다. 아뿔싸. 주차장에서 낌새를 알아차리고 확인을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쩌랴. 긴급출동서비스를 호출하여 상황을 설명하니 타이어 펑크가 심하게 난 상태라서 견인해야 하고 그것도 그냥 끌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차체를 통째로 차에 실어서 옮겨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날은 춥고 바람은 차고 인적은 드문 한적한 길가에서 커다란 트럭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오고 갔다. 좋게 생각해야지. 액땜이지 않으랴. 정월 초하루, 올해 모든 안 좋은 일은 이 한 가지로 모두 다 땜 하지 않겠는가. 설날, 남편은 근무하는 아내를 대신해 식구들을 데리고 성묘하러 갔다가 밀리는 길 위에서 집으로 향하고 있다고 한다. 달려와 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시시때때로 전화하여 위로의 말을 건넨다. 운! 수! 대! 통! 할 것이라고.커다란 트럭을 몰고 오신 견인차 기사분은 아침 차례만 지내고 나와서 종일 근무 중이라면서도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신다.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냐! 시며. 하루하루 충실히 살다가 하늘에서 부르면 가는 거죠! 라고 하신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명절 휴일에 펑크를 때우는 곳이 있기나 할까? 싶었지만, 하루 24시간 365일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언제나 웃음으로 일하기에 ‘스마일’이라는 상호를 붙인 타이어 집. 부자(父子)가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일한다는 그곳에서 도로의 턱에 걸려 찢어진 뒷바퀴뿐 아니라 이참에 네 바퀴를 완전 새것으로 다 교체해버렸다. 이때 아니면 언제 그분들께 웃음 짓게 할 수 있으랴 싶어서. 68만 원을 송금하며 그도 스마일, 나도 스마일, 우리 모두 스마일! 할 수 있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본다.

어머니와 설날 / 김종해

어머니와 설날/ 김종해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 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는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 시집『어머니, 우리 어머니』(문학수첩,2005)..........................................................이 시는 아우인 김종철 시인과 함께 어머니를 그리는 시편들로만 각 20편씩 한 권으로 묶은 공동 시집 ‘어머니, 우리 어머니’에 수록되어 있다. 그들의 남다른 형제애는 문단에 잘 알려진 바이며, 형제의 사모곡은 더욱 유명하다. 공동시집을 통해 어머니의 사랑과 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깊이를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았다. 시편 갈피마다 어머니의 사랑이 어떻게 전해지고 그들에게 녹아들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형제뿐만이겠나.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때늦은 후회와 그리움은 어머니가 곁을 떠난 뒤에야 더 절절하고 격렬히 치밀어 오르니.내 어머니도 천년만년이나 사실 줄 알고 걸핏하면 놀려먹듯 핀잔을 주고, 밖에서 발화한 온갖 짜증을 어리광처럼 부려놓곤 했는데 3년 전 황망히 가신 뒤 지금껏 이토록 통렬하게 가슴을 쥐어뜯을 줄이야. 김종철 시인의 시 ‘엄마 엄마 엄마’를 읽다가 눈물을 기어이 쏟아내었다. “나는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른다. 사십이 넘도록 엄마라고 불러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싫지 않으신 듯 빙그레 웃으셨다. 오늘은 어머니 영정을 들여다보며 엄마! 엄마! 엄마! 엄마! 하고 불러 보았다. 그래그래, 엄마! 하면 밥 주고, 엄마! 하면 업어 주고, 엄마! 하면 씻겨 주고, 아! 아!… 엄마! 하면 그 부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고 아름다운 기도인 것을!” 나도 호흡기를 입에 문 엄마의 귀에다 수없이 부르고 또 불렀던 ‘엄마!’섣달 그믐밤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턱을 고이고 코딱지처럼 달라붙어 졸고 있는 내게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했다가 종래엔 방으로 옮겨 이불을 덮어주시곤 했다. ‘어머니가 밤새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철없이 날린 방패연의 꼬리만 가물가물하다. 어머니가 빚어주지 않은 설날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은 상황은 상상조차 못 했다. 늘 곁에 계신다는 생각에 설날 어머니에게 세배 올리는 것이 연중 유일한 범절이었다. 그렇게 졸지에 떠나시리라고는 도무지 생각지 못했고 따라서 방비도 없었다.어머니 생애 마지막 어느 가을날, 비교적 건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리고 한 달 뒤 쓰러지시고 꼭 100일 만에 세상을 뜨셨다. 세수로는 아흔이지만 나로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차례를 지내면서 맨 나중 오래 엎디어 용서를 빌며 마음으로 울었다. 내게 설날은 살아생전 근심만 안겨드렸던 불효자의 무릎 꿇음 예배시간이다. 어머니의 ‘햇살’을 떠올리는 것조차 실은 염치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에서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