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97>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

양지 스님은 삼국유사를 통해 소개하기 이전부터 녹유신장상의 복원 등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시대 스님이다.삼국유사를 통해 양지 스님의 숨겨진 재주를 더 많이 알 수 있게 한다.스님이자 조각가, 서예가 등을 총칭한 종합예술가라고 해야겠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양지 스님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지팡이다.석장이 혼자 자루를 걸머지고 도깨비처럼 마을을 날아다니며 탁발하는 장면은 신화 이상의 신비로움과 재미를 선사한다. 기와조각과 석재가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는 양지 스님이 머물렀다던 석장사 터에서 영묘사 장륙존상, 사천왕상, 전각, 탑, 삼천불을 조각하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를 쓰는 양지 스님을 그려본다. 무엇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따로 보관하고 있던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녹유신장의 조각을 퍼즐 맞추듯 완벽하게 재현해낸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볼 수 있어 다행이다. ◆삼국유사: 양지가 지팡이를 부리다승려 양지의 조상과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다만 신라 선덕여왕 대에 그의 행적이 나타났을 뿐이다.지팡이 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하는 집으로 날아가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었다.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이 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절을 석장사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이한 행적이 모두 이와 같았다.그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두루 능통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또 글씨와 그림을 잘 그렸다.영묘사의 장륙삼존 및 사천왕상과 아울러 전각과 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 아래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및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 두 절의 현판을 썼고,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 불을 조각해 그 탑 안에 안치하고 그 탑을 절 가운데 모시고 예를 올렸다.그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을 만들 때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했다.그래서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퉈 진흙을 나르면서 그가 지은 풍요를 불렀다. 지금까지 이 지방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힘든 일을 할 때에 다들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대개 이로부터 시작된 것이다.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만3천700석이었다. 논평해서 말한다.양지 스님은 재주를 다 갖췄고 덕행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만 큰 인물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고 자기의 실력은 숨긴 것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재 마친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정적 깃든 오리 모양 향로에 홀로 향불 피우네/ 남은 불경 읽고 나니 더 할 일 없어/ 부처님 모습 빚어 합장하고 뵈오리.’ ◆100년 잠에서 깨어난 녹유신장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국립경주박물관과 공동으로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의 3가지 유형을 사천왕사지 발굴이 시작된 지 100년 만에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문화재연구소와 경주박물관이 학술교류 협약을 체결하고 각각 보관하던 7점의 파편을 복원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통일신라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백년의 잠에서 깨어났다.사천왕사를 지켜온 녹유신장상이 깨어진 채 발견되고도 제자리를 못 찾고 기다리다 10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 사천왕사는 679년에 문무왕이 경주 낭산 신유림에 당나라 50만 대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승려 명랑의 밀교의식을 실행하며 건립한 호국사찰이다. 사천왕사 녹유신장상은 1915년 최초 발견 당시 세 종류의 벽전은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깨어진 조각만이 사천왕사 목탑 자리에 묻혀 있었다.큰 눈과 콧수염, 날개가 달린 투구와 화려한 갑옷, 신발 또는 맨발로 칼 혹은 화살을 든 무장 3명이 험악한 표정의 생령을 깔고 앉아 보는 이를 주시한다.앞을 지나가면 각기 달라져 보이는 장수의 표정에서 이들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직감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에 사천왕사 발굴을 개시했고 1922년부터 고적발굴조사사업의 하나로 본격적인 발굴을 진행했다.이는 조선총독부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발굴로 사찰과 녹유신장상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광복 이후 발굴 자료와 연구 결과를 토대로 벽전 파편을 조립한 결과 왼손에 칼을 든 신장과 활과 화살을 든 신장 등 두 종류의 신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체계적이고 정밀한 발굴을 거쳐 200여 점의 파편을 3차원 입체 3D로 스캔하고 이를 참고로 세 종류의 신장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또 이들이 사천왕사지 동서목탑 기단 벽면을 장식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은 세 종류의 신장이 한 묶음으로 탑 한 면에 두 묶음씩, 동서 목탑 기단에 16개의 묶음으로 배치되어 녹유신장으로 이루어진 벽전은 모두 48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하단부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서탑지 북편에서 발굴 수습한 상단부 6점이 같은 상이었음을 확인했다.2017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7점의 파편을 조립하고 빠진 부분은 같은 유형의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의 파편을 참고하여 벽전을 복원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처음 사천왕사 발굴을 진행한 지 100년 만에 최초로 원래 짝을 찾아 복원된 왼손에 칼을 든 녹유신장상을 비롯해 3쌍의 녹유신장상을 전시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양지스님의 지팡이석장사는 양지 스님이 들고 다니던 지팡이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른다.스님의 지팡이는 100년 묵은 대나무로 만들어 가벼웠다.오래되기도 했지만 스님이 다니다 절로 돌아와서는 굴뚝에 세워두기 때문에 연기를 먹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님의 지팡이는 현명하여 스님이 불공을 드리는 시간을 아끼도록 매월 1일과 15일이면 혼자 포대를 짊어지고 날아가 시주를 해 돌아와 스님이 공양을 거르지 않도록 했다. 서라벌의 왈패들이 지팡이와 양지 스님의 도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힘깨나 쓴다는 왈패들이 3월 보름에 자루가 두둑하도록 탁발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목에서 지팡이를 잡았다.그리고 탁발한 자루를 빼앗으려고 다섯 명의 장정이 달려들었으나 결국 석장에서 자루를 벗기지 못했다.지팡이는 돌로 내리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오히려 석장이 자루를 움켜잡은 채 장정들을 떠밀어 모두 북천의 찬물에 빠뜨려버렸다. 그리고는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며 춤추듯 날아 가버렸다. 왈패들은 그날 이후로 지팡이가 나타나면 멀찌감치 떨어져 큰절을 하고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그리고 스님의 지팡이가 돌보다 더 단단하다고 하여 석장(石杖)이라고 불렀다. 또 석장이 가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당시 서라벌에는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이 자주 출몰해 사람을 해치기도 했다.민가에서는 해가 지면 아예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석장사는 깊은 산중에 있어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수시로 나타났다.이를 경계해 양지 스님은 석장에 주문을 걸었다.굴뚝에 세워둔 지팡이가 어두워지면 석장의 크기로 길어져 괴물의 모습이 됐다.간혹 날카로운 울음을 울기도 하며 가까이 오는 짐승들을 물리쳤다. 두세 차례 호랑이가 접근했지만 석장이 크게 울며 다가가자 호랑이는 그 이후로 석장사 가까이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이 양지 스님의 지팡이가 석장의 크기로 늘어난다 하여 석장이라 불렀다. 석장을 가지고 도를 닦는 양지 스님이 사는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석장사라고 불렀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6>원광법사. 하

삼국유사는 원광법사편에서 당의 속고승전과 고본 수이전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그대로 싣고,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도 옮겨 놓았다.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다 나열하니 독자가 판단하라고 주석을 달았다. 수이전에서 원광법사는 설씨이며 혼자 살면서 삼기산에서 조용히 불법을 배웠다.속고승전에는 박씨이며 중국에서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드러난다.수이전은 또 원광법사의 도력을 나타내면서 여우가 신의 목소리로 원광에게 후세에 서로 계를 주기로 약속하는 장면을 그려 신비롭다. 법사의 글재주가 뛰어나 나라에서도 인정받았다는 내용은 같다.삼국사기 열전에서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평생의 지표를 삼을 세속오계를 내렸다는 내용을 소개해 지금까지 그 뜻이 전하고 있다. 속고승전의 99세 입적과 다르게 수이전은 84세에 입적한 것으로 기록하고, 삼국사기 열전은 80세쯤에 입적해 금곡사에 부도탑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고 기록했다.지금 경주 금곡사의 부도탑을 원광법사의 흔적으로 이해하고 학자들도 학생들과 함께 답사하고 있다. 경주시는 석장동에 청소년수련시설 화랑마을을 건설했다.다양한 체험과 공부를 통해 나라의 동량으로 자라날 청소년 심신단련의 장을 마련하고, 전국의 청소년들이 이용할 수 있게 시설을 공개하고 있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동경(경주)의 안일호장인 정효의 집에 있는 고본 수이전의 원광법사전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법사의 속성은 설씨로 서울 사람이다.처음에 승려가 돼 불법을 배웠는데 30살이 되자 조용히 살면서 수도할 것을 생각하고 홀로 삼기산에 살았다.그 후 4년이 지나 어떤 비구가 와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를 짓고 2년을 살았다.그의 사람됨이 모질고 사나웠으며 주술로 수련하는 것을 좋아했다. 원광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불경을 외우는데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그대의 수행은 참으로 좋구나. 대체로 수행하는 자는 많으나 법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 이웃에 있는 비구는 주술을 닦고 있지만 시끄러운 소리가 다른 사람의 고요한 사념을 뒤흔들고, 그가 머무르고 있는 곳은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돼 미운 생각이 날 지경이다. 법사께서 나를 위하여 그 사람에게 말을 해 옮겨가게 해 주게나. 만일 오래 머문다면 어쩌면 내가 갑자기 죄 되는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했다. 이튿날 법사가 가서 “제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스님은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큰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그 비구가 “수행이 지극한 사람도 마귀에 현혹됩니까? 법사께서는 어찌하여 여우귀신의 말을 듣고 근심합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날 밤 신이 다시 와서 “전에 내가 한 말에 대해 비구는 무어라고 대답하던가?”라 묻자 법사는 신이 크게 화를 낼까 두려워하여 “아직 말을 못했으나 만약 굳이 말을 하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신이 “내가 이미 다 들었는데 법사는 어째서 말을 보태는가? 그대는 단지 잠자코 내가 하는 것만 보게나”라고 말 한 후 가버렸다.밤중에 벼락 같은 소리가 났다.그 다음날 가서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가 거처하던 암자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신이 “법사가 이곳에만 있으면 자기는 이로운 수행을 할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덕은 없을 것이네. 어찌하여 중국에서 불법을 취하여 이 나라의 갈 길을 못 찾는 무리를 인도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법사가 “중국에 가서 도를 배우는 것이 저의 소원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험해서 스스로 가지 못할 뿐입니다”고 답하자 신이 중국으로 갈 계책을 자세히 가르쳐 줬다.법사가 그 말을 따라 중국에 가서 11년을 머무르면서 삼장에 널리 통달하고 겸하여 유학도 배웠다. 진평왕 22년(600) 경신에 법사가 신라로 돌아올 행장을 정리해 중국에 왔던 조빙사를 따라 본국으로 돌아왔다.법사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기 위해 전에 살던 삼기산의 절로 갔다. 밤중에 신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의 길을 다녀옴이 어떠하던가?”라고 하니 법사가 “신의 크신 은혜를 입어 편안히 다녀왔습니다”고 대답했다.신이 “나 또한 법사에게 계율을 주겠네”라고 하면서 윤회하는 세상에서 서로 구해주자는 약속을 했다. 신이 “3천 년을 살아왔지만 덧없는 죽음을 면할 수 없다네. 그래서 나는 얼마 안 가서 그 고개에 이 몸을 버릴 것이니 법사는 와서 멀리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게나”라는 말을 남겼다.약속한 날을 기다려 법사가 가서 보니 옻칠한 것과 같은 검고 늙은 여우 한 마리가 헐떡거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법사가 처음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 신라 조정의 왕과 신하들이 그를 매우 존경해 스승으로 모시니 법사는 늘 대승경전을 강론했다.이때에 고구려와 백제가 늘 변방을 침략하므로 왕이 이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고자 법사에게 구원병을 청하는 글을 짓게 했다.황제가 그 글을 보고 30만 명의 군사를 내어 친히 고구려를 정벌했다.이로부터 법사가 유술까지도 두루 통달했음이 알려졌다.나이 84세에 세상을 떠나니 명활성 서쪽에서 장사를 지냈다. 또 삼국사기 열전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귀산이라고 하는 현명한 분은 사량부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과 친구가 됐다.두 사람이 서로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바로잡아 처신하지 않는다면 필경 욕을 불러들일 것이다. 어진 분을 찾아가서 도를 물어보자”라고 했다. 이때 원광법사가 수나라에서 돌아와 가슬갑에 머물러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이 그의 처소에 나아가 “속된 사람들이라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한 말씀 해주시면 평생의 지표로 삼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이에 원광이 “세속에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가 있으니 첫째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가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친구를 사귐에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넷째는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생을 가려서 해야 하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 말씀을 받들어 행해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그 후 두 사람이 싸움터에 나아가 모두 국가에 특출한 공을 세웠다. 또 건복 30년(613) 계유 가을에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가 와서 황룡사에 백좌도량을 열고 여러 고승을 청해서 불경을 강의했는데 원광이 가장 윗자리에 앉았다. 원광은 성품이 텅 비고 허정한 것을 좋아하였으며 말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성내는 기색이 없었다.그는 이미 나이가 많아져 수레를 타고 대궐 안까지 들어가니 당시 덕망과 인의를 갖춘 훌륭한 분이 많았지만 그보다 나은 사람은 없었다.그의 뛰어난 문장은 한 나라를 기울일 정도였다. 나이 80세께 정관 연간에 세상을 뜨니 부도는 삼기산 금곡사에 있다.당전에서는 황륭사에서 입적했다고 했으나 그 장소가 분명하지 못하다.아마도 황룡사가 잘못 전해진 듯하니 이는 마치 분황사를 왕분사로 한 예와 같다. 진나라와 수나라 시대에 우리나라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불도를 배운 자는 드물었고 설혹 있다 하더라고 크게 떨치지 못했다.원광 이후에는 중국으로 유학 가는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어졌으니 이는 바로 원광이 길을 열었던 것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화랑 귀산과 추항이 힘들게 공부하고 수련에 매진했다.3년이 지난 어느 날 두 친구는 “이제 제법 실력을 갖췄는데 우리 스스로 노력으로는 한계에 부딪쳤다. 뛰어난 스승의 가르침을 얻어야 더 발전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이들은 원광법사에게 가르침을 받기로 하고 먼저 법사의 실력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두 화랑은 법사가 왕궁에서 황룡사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급습했다.그러나 법사는 여덟 명의 법사로 나뉘어 귀산과 추항을 거꾸로 공격해 꼼짝하지 못하게 손발을 묶어 꿇어앉게 했다. 귀산과 추항이 그제야 엎드려 절하며 높은 경지에 이른 법사의 덕을 칭송하며 배우고 싶은 열망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죄하고, 자신들을 제자로 받아주기를 간곡하게 청했다. 법사는 다시 하나의 몸으로 돌아와 “부족한 솜씨로 스승을 시험하려는 것은 잘못된 예절”이라며 꾸짖고 반대로 그들을 시험했다.얼음을 깨고 물속에서 3일을 버티면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귀산과 추항은 이를 견뎌 원광법사에게 무술 가르침을 받은 최초의 제자가 됐다. 법사는 제자들에게 심신을 함께 수련하게 하며, 평생 갖춰야 할 덕목으로 세속오계를 일러줬다.귀산과 추항은 법사의 가르침을 평생의 계율로 삼아 다시 수련에 매진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삼국유사면’명칭 변경 현판 제막식

군위군은 올 1월 1일부터 고로면이 삼국유사면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을 기념해 지난 1일 현판 제막식을 개최했다.이날 제막식은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3차 대유행에 대비해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지침을 준수한 가운데, 김기덕 군위군수 권한대행, 심칠 군의회의장, 박창석 도의원, 이명호 노인회장 등 최소 인원이 참석, 모든 부대행사는 취소하고 현판 제막행사만 가졌다. 삼국유사면의 옛 이름인‘고로면’명칭은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시 일본의 일방적인 지배 편의를 위해 붙여진 것으로 지역 주민들의 동의나 지역 정체성과는 거리가 먼 이름으로 그동안 주민들 간에는 명칭변경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이제 고로면 명칭은 107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삼국유사면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김기덕 군위군수 권한대행은 “오늘은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고로면이 삼국유사면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널리 선포한 뜻깊은 날이다”면서 “군위 새천년의 역사가 삼국유사면의 지명 탄생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삼국유사면의 정체성을 살리고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계적인 발전계획 수립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5>원광법사(상)

원광법사는 신라십성에 이름은 오르지 않아도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알려지고 있다.중국의 조정에서조차 그의 공부를 높이 인정해 주고 있었다.신라 진평왕이 중국에 원광법사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해 돌아왔다. 원광법사는 화랑의 세속오계를 지어 화랑들의 수련지침을 마련했다.청소년들이 수련하는 지침으로 삼았던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표상으로 삼을 계율로 전해온다.그는 당시 중국으로 보내는 나라의 문서는 물론 왕실에서 작성하는 모든 문서는 그의 손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명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삼국유사는 그의 일대기에 대해 당나라의 속고승전과 수이전 두 곳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각각 소개했다.두 기록은 원광법사의 성이 박씨와 설씨로 다르게, 또 죽음에 이른 나이도 99세, 84세로 다르게 전한다. 속고승전과 수이전에 전하는 원광법사의 이야기를 두 차례로 나눠 살펴보기로 한다. ◆삼국유사: 원광법사당나라 속고승전 제13권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의 속세 성은 박씨 이다.본래 삼한에 살았는데 원광은 바로 진한 사람이다.집안 대대로 이 땅에 살았다.또 원광의 비범한 기량은 넓고도 컸으며 글을 매우 좋아해 노장학과 유학을 두루 섭렵하고 여러 학자들의 역사책을 검토하고 비교·연구했다. 그의 글은 매우 뛰어나 삼한에 떨쳤다.지식의 해박함과 풍부함에 있어서는 중국에 비하여도 모자라지 않았다.끝내 스물다섯 살에 친척과 벗들을 떠나 배를 타고 중국 금릉으로 갔다. 이때는 진나라 시대로 문명국이라 불릴 때였다.처음에는 장엄사 민공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원광이 진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교에 귀의할 것을 청했더니 칙명으로 허락했다.이렇게 해서 그가 처음으로 승려가 돼 구족계를 받고 불경을 강의하는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해 성실 열반을 얻어 마음속에 간직해두고 삼장과 석론을 두루 탐구했다.또 나중에는 오나라의 호구산으로 들어가 정념과 전정을 서로 따르고, 총체적이면서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승려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또 사아함경을 종합해서 섭렵하고 연구는 8정에 통해 선한 일을 밝힘은 쉽게 행해지고, 질박하고 정직함은 어그러짐이 없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음과 매우 잘 맞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생각을 했다. 당시 산 밑에 살고 있던 신도가 원광에게 강의해 줄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간절하게 청하므로 마침내 그의 뜻에 따라 처음에 성실론을 강의하고 마지막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다. 모든 생각과 해석이 준수하고 명철했다. 아름다운 말로 글의 뜻을 엮어가니 듣는 사람이 기뻐해 마음에 꼭 들어 했다.그의 명망은 널리 퍼져 중국 남방 일대까지 펼쳐졌다.이에 가시밭을 헤치고 바랑을 둘러메고 찾아오는 사람이 고기비늘처럼 이어졌다. 때마침 수나라 임금의 세상이 돼 그 위세가 남쪽 나라까지 미치니 진나라의 운명이 다하였다.수나라 군인들이 양도로 쳐들어오자 마침내 원광도 병란의 피해를 입게 되어 잡혀 죽게 될 참이었다. 수나라의 대장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서 불을 끄려 했으나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만이 탑 앞에 묶이어 막 죽임을 당하려 하는 것이 보였다.대장은 그 이상한 일을 괴이하게 여겨 즉시 결박을 풀어 놓아주었다.원광이 위기에 임해 감응됨이 이와 같았다. 원광은 오나라와 월나라에서 학문이 통했으므로 문득 주나라와 진나라의 문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개황 9년(589)에 수나라 임금이 있는 서울로 와서 지냈다.이때는 불법의 초회를 맞아 섭론종이 처음으로 일어나니 경전의 오묘한 말씀을 삼가 받들어 미묘한 실마리를 일으켜 세웠으며, 또한 지혜로운 해석을 신속하게 하니 그의 명성이 서울에 높이 드날렸다. 멀리 신라 본국에서 이 소문을 듣고 수나라 임금에게 글을 올려 원광을 보내줄 것을 여러 차례 청했다.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노고를 위문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원광이 신라로 돌아오니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가 서로 기뻐했다.신라의 왕도 그를 만나보고 거듭 공경하고 존경해 마치 성인처럼 떠받들었다.원광의 성품이 겸허하며 고요하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노여운 기색을 절대로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문서나 왕에게 올리는 글 등의 오고 가는 국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온 나라가 그에게 쏠려 떠받들었고 나라 다스리는 방책을 모두 그에게 맡겼으며 교화하는 도리도 그에게 물었다.벼슬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실상은 나라를 통틀어 돌아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기회 있는 대로 교훈을 널리 펴서 지금까지도 모범으로 내려오고 있다. 건복 58년(640)에 그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조금씩 느끼다가 7일이 지나 간절한 계를 남기고 그가 머무르던 황룡사 안에서 단정히 앉은 채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99세이니 바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었다. 임종 당시 절의 동북쪽 허공 중에 음악소리가 가득 차고 신이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하니 승려들과 속인들이 슬퍼하면서도 그의 감응으로 알고 좋은 일로 여겼다.마침내 교외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나라에서 의장과 모든 장례용 도구를 내려 왕의 장례와 같이 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광법사의 도력진평왕은 신하들과 사냥하기를 좋아해 한 달에 대여섯 번은 말을 타고 고성 숲을 내달렸다.진평왕 35년 초여름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꿩이나 노루 멧돼지도 새끼를 낳아 번식이 한창일 때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은 활을 둘러매고 숲으로 들어갔다.이때는 봄 가뭄이 길어 농작물이 타들어가 백성들이 농사에 힘겨워 할 때였다. 몰이꾼들이 이리저리 뛰며 짐승들을 몰아대는데 훤칠하게 키 큰 노루 한 마리가 달아날 생각은 아니하고 장미덩쿨 주변을 맴돌았다.진평왕은 시위를 당겨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노루가 가슴과 목에 살을 맞고 숲속으로 들어가 고꾸라졌다. 왕이 대신들보다 먼저 달려가 보았더니 새끼 두 마리를 품에 안은 채 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져 있었다. 사냥에서 돌아온 왕은 그날 이후부터 이상하게 목과 가슴에 통증이 심해져 앓아누웠다.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어의가 백방으로 약을 써도 병세는 차도가 없었다. 왕이 전국에 방을 붙여 용한 의원을 찾았으나 병에 차도가 없고 점점 깊어져 수라상조차 받들기를 즐겨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이때 내인 중에 한 사람이 왕에게 원광법사의 내력이 심후해 만사에 통달했으니 질병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 건의했다. 왕의 부름을 받은 원광이 궁으로 들어와 불법에 대한 강론을 벌인지 7일이 지나지 않아 병세가 거뜬하게 나아버렸다.원광법사가 강론을 펼칠 때는 가끔 몸체에서 신비한 광채가 나면서 방안 가득 달콤한 향기가 퍼지기도 했다. 병이 완전히 나은 왕은 그때부터 원광법사를 곁에 두고 불법에 대한 강론은 물론 국사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의논하며 국사로 모셨다. 특히 호시탐탐 나라의 경계를 넘보는 백제와 고구려 군사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의 병력지원을 청하는 외교문서를 원광이 작성했는데, 이를 읽어본 중국황제가 문장에 감탄하며 대뜸 병사를 보내 고구려 군사들을 물리치게 했다. 원광은 왕의 지나칠 정도의 존경과 대우를 받아 입적할 때까지 왕실의 마차를 타고 궁을 드나들며 나랏일을 도왔다. 법사는 100세가 되는 날에 황룡사 법당에서 고요하게 앉은 채 입적했다.10일이나 공중에 뜬 채로 온몸에서 광채를 발하며,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어 사방에서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제작한 ‘삼국유사 다큐멘터리’ 공중파 통해 방영

군위군이 제작한 삼국유사 특집 다큐멘터리가 24일 오후 11시10분 대구·안동·포항 MBC를 통해 50분간 방영됐다.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뿌리를 알려주는 독보적인 역사서이다.특히 역사, 문학, 철학, 종교 등 전 세계인이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한국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담은 인류 역사의 보고로 평가받고 있다.군위군은 ‘삼국유사’가 지닌 기록 유산의 가치를 알리고 국민적 관심을 높이고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군은 그동안 삼국유사 목판 복원 사업, 삼국유사 뮤지컬 공연, 삼국유사 한영 도록 제작 및 기초 아카이브 구축 등 삼국유사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부단한 노력을 해 왔다.최근에는 삼국유사 웹툰인 ‘한여름 밤의 꿈’을 모두 12편으로 제작해 레진코믹스, 카카오페이지, EBS툰, 모두의 툰을 통해 연재하고 있다.또 삼국유사 콘텐츠를 주제로 조성한 삼국유사 테마파크를 올해 7월부터 개장해 운영하고 있다. 김기덕 군수 권한대행은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은 삼국유사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한걸음 더 다가가고 삼국유사의 고장으로서 군위가 가진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한편 군위군은 내년에도 삼국유사 기록유산 등재 및 삼국유사 역주 사업 등을 추진해 삼국유사를 알리는 데 행정력을 집중할 방침이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문화기행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는 나홀로 여행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송년행사다. 번잡한 곳을 피해 가볍게 다녀올만한 고즈넉한 문화탐방 코스는 주변에 의외로 많다. 그 길을 안내하는 한 권의 책이 더 없이 반갑다.◇새로쓰는 삼국유사2/강시일 지음/인공연못/335쪽/1만8천 원삼국유사는 내용의 대부분이 역사를 은유해 작성한 전설 같은 이야기로 꾸며진사서다. 이 역사 이야기를 다시 재가공한 ‘새로 쓰는 삼국유사 2권’이 지난해 1권에 이어 속편으로 나왔다.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문화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로 꾸며 역사문화를 다양한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다.삼국유사가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 쓴 글이라면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역사적 사실들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며 재구성한 소설적 이야기로 꾸며 재미를 더했다.이 책은 삼국유사 내용을 해석해 관련 자료들과 함께 소개하고, 이를 토대로 스토리텔링한 내용들을 새로 쓰는 삼국유사라는 제목으로 써내려 간 역사소설 같은 내용으로 전개된다.‘새로쓰는 삼국유사’ 저자인 대구일보 강시일 기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 현장을 찾아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문화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꾸며 역사문화현장을 소개싶다”며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혔다.이어 “지역의 역사문화현장이 가진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재구성해 영화와 드라마, 시와 소설,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산업화한다면 경제 활성화와 함께 보다 윤택한 삶의 질은 덤이 될 것”이라 전했다.‘새로쓰는 삼국유사 2권’은 1권의 기이편에서 소개한 신라왕조사의 원성왕 이후의 왕조사와 삼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이야기를 실은 흥법편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흥덕왕과 해상왕 장보고, 당나귀의 귀 경문왕, 처용랑과 망해사, 진성여왕, 효공왕과 경명왕에 이어 신라 멸망군주 경순왕까지 새로운 시각에서 역사를 꾸몄다.흥법편에서는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의 이야기와 흥륜사 금당에 그려져 있었던 10명의 유명 승려에 대한 신화같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내년에는 3권과 4권에 탑상편,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의 내용을 담아 삼국유사 전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책으로 펴낸다는 계획이다.◇코 떼인 경주 남산/이하석 지음/한티재/240쪽/1만5천 원이하석 시인의 경주 남산 답사기. 고등학생 시절부터 경주 남산을 사랑해온 시인은 이 산의 수많은 골짜기와 등성이, 산책길을 오랫동안 걸었다. 허물어진 탑 자리와 옛 절터를 지나기도 하고, 바위에 새겨진 부처를 만나 신라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도 했다. 사진도 찍고 그림도 그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흩어졌던 탑들이 복원되기도 하고 방치돼 있던 유적이 정비되기도 했다. 책에 실린 열세 편의 글을 읽다 보면, 오랫동안 남산을 사랑해온 시인의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걷는 맥박을 느끼게 된다.경주 남산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한국 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 해박하지 못하다고 저자는 스스로 말하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천착해 온 원로 시인의 안목으로 소개하는 경주 남산은 독자에게 문학적 향취와 함께 역사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특히 ‘삼국유사의 현장기행’이라는 책을 펴낼 만큼 오랫동안 신라의 역사와 설화 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수집해 온 저자의 공력이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긴 세월 동안 저자가 곳곳을 걸으며 옛 절터와 불상과 돌탑의 유래를 사색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며 쓴 이 책은, 경주와 남산을 알아가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저자는 엽서 크기만 한 스케치 수첩과 미니 팔레트를 갖고 다니며 바위에 걸터앉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집에 돌아와 산에서 찍은 사진을 작은 화폭에 담기도 했다. 경주 남산의 불탑이며 바위, 형산강 너머로 보이는 전경을 그린 수채화에는 시인의 남산 사랑이 담뿍 담겨 있어서, 독자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그림엽서 같기도 하다.최근 들어 국내여행에 관심이 더욱 높아지면서 경주를 찾는 여행객들이 늘고 있다. 책을 들고 남산을 걸으려는 독자들을 위해 지도를 책 앞에 실었다. 저자가 걸었던 주요 지점을 표시하고 글의 순서에 따라 번호를 매겨, 책을 읽으며 시인이 걷고 있는 위치가 어디쯤인지 일일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마애불과 돌탑에 서려 있는 신라인들의 희망과 믿음을 떠올리며 경주 남산을 직접 걸어보려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지도가 될 것이다.◇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김치호 지음/한길아트/408쪽/2만 원‘창령사 오백나한의 미소 앞에서’는 깊고 넓은 고미술의 세계에 심취한 어느 경제학자가 한국미술의 아름다움과 원형을 찾아 떠난 30여 년의 기록을 담은 에세이다.미술계에 속하지 않은 저자가 일반 컬렉터이자 경제학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미술시장의 위기와 대안, 작품소유에 대한 지독한 욕망을 좇은 사람들과 관련한 재밌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한국미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 위해 국내외 박물관과 미술관 전시를 두루 섭렵하고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기도 한다. 저자가 가장 아끼는 민화와 고가구 등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민예에 대해서도 심혈을 기울여 썼다.저자는 그간 자신의 행적을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고 말한다. 민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 고미술 사랑은 한국미술의 원형에 대한 호기심으로, 궁극의 아름다움에 대한 해탈로 이어졌다. 이 책은 이제 막 고미술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 컬렉션의 유혹을 느끼는 사람, 한국미술의 세계화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하는 작은 빛이 될 것이다.저자는 이 책에서 누구는 우리 고미술품을 ‘골동’이라 폄훼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수집가들의 취미 또는 완상의 영역으로 치부한다고 했다. 하지만 안목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 우리 삶 속에 체화되고 구현된 색채미나 형태미가 고미술의 조형성과 미감에 맥이 닿아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적었다.창령사 오백나한에는 성과 속을 넘나드는 나한의 이미지가 극대화돼 있다. 그 느낌은 세속적이면서 초월적이고, 자유로우면서 범박하다. 고졸함의 위대한 승리이자 고려미술의 꽃이다. 1천년 전 고려의 석공 장인들은 신묘한 솜씨로 500점의 얼굴과 옷자락을 손 가는 대로 무심의 마음으로 빚으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분출하는 법열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같은 듯 다르고 거친 듯 편안한 그 표정 하나하나가 보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넘어 격렬한 감동과 환희심으로 전율케 한다.경제학자이기도 한 인 작가는 한국미술의 미학적 특질과 컬렉션 문화를 탐구하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3>오대산 오만진신

오대산에는 지금도 유명한 절이 곳곳에 위치해 불교 신도뿐 아니라 역사학도, 문화관광탐방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오대산에 가장 먼저 절을 지어 부처를 공양한 것은 자장법사다.자장법사가 선덕여왕 대에 오대산에서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던 곳이 월정사이고, 처음 부처를 친견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다시 들어간 곳이 정암사이다.월정사에서 북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상원사가 나오고, 사자암, 적멸보궁이 차례로 나타난다.적멸보궁에 이르는 길은 가파른 경사를 올라야 하는 산길이다. 자장법사 이후에 신라의 태자 보천과 효명 형제가 무리에서 벗어나 오대산으로 숨어 수련에 매진했다.효명태자는 다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그를 성덕왕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확정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보천태자는 왕권조차 외면하고 오로지 수련에 매달려 울진 장천굴(지금의 성류굴)과 오대산을 날아다니는 신통력을 발휘하기도 했다.보천은 입적에 들면서 글을 남겨 오대산에 원통사, 금강사, 수정사, 백련사, 화엄사, 법륜사, 문수갑사 등의 절을 지어 밤낮으로 예참하라며 경비를 세금으로 충당하게 했다. ◆삼국유사: 오대산 오만진신산중고전을 살펴보면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처음으로 자장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 진신을 친견하려고 선덕왕 대인 정관 10년 병신(636)에 중국으로 들어갔다.중국의 태화지 못가에 있는 문수보살 석상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에 홀연히 문수보살이 네 구절로 된 게를 줬다.자장이 꿈에서 깨어나 게를 기억할 수는 있었으나 모두 범어라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홀연히 승려 한 분이 붉은 비단에 금빛 점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가 사용하던 밥그릇 한 벌 및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 법사의 곁으로 와서 “무엇 때문에 수심에 잠겨 있느냐”라고 물었다. 법사가 “꿈에 게 네 구절을 받았는데 범어라서 그 뜻을 풀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 답했다.그 스님이 “가라파좌낭이란 일체의 법을 깨달았다는 것이며 달예치구야라는 무소유라는 말이고, 낭가희가낭은 이와 같은 법성을 알았다는 것이며, 달예노사나란 노사나불을 곧 친견한다는 말이다”라 번역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온 가사 등을 주면서 부탁하기를 “이것은 우리 스승이신 석가세존이 쓰시던 도구이니 그대가 잘 보관하도록 하라”고 말했다.또 “그대 본국의 동북방에 있는 명주 땅 오대산에 1만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계시니 그대는 가서 뵙도록 하라”고 말을 하고는 사라졌다. 법사가 영험 있는 유적을 두루 찾아보고 본국으로 돌아오려 하는데 태화지의 용이 나타나서 재를 청하므로 7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그러자 용이 법사에게 “지난번에 게를 전한 노승이 바로 진짜 문수보살입니다”고 했다. 자장법사는 정관 17년(643)에 강원도 오대산에 와서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했으나 3일 동안이나 날이 어두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다시 원녕사에 머물면서 비로소 문수보살을 뵙게 됐다고 한다.그후 칡넝쿨이 얽혀 있는 곳으로 갔으니 지금의 정암사이다. 그 뒤에 범일의 제자인 승려 신의가 자장이 휴식하던 곳으로 찾아와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다.신의가 죽자 암자 또한 오랫동안 버려져 못쓰게 됐는데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다시 암자를 세우고 거처했으니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이 절이다. 자장법사가 신라로 돌아온 후 정신대왕의 태자인 보천, 효명 두 형제가 하서부에 와서 각간 세헌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그 다음날 큰 고개를 넘어 각각 무리 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편으로 가서 여러 날 동안 유람했다. 어느 날 저녁에 두 형제는 속세를 벗어날 뜻을 두고 은밀하게 약속한 후 아무도 모르게 도망해 오대산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모시고 호위하던 자들은 태자들이 간 곳을 알지 못해 서울로 돌아왔다. 두 태자가 산속에 이르자 푸른 연꽃이 갑자기 땅 위에 피었다.형이 그곳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니 이것을 보천암이라 했다.여기서 동북쪽을 향해 600여 걸음을 가면 북대의 남쪽 기슭에 역시 푸른 연꽃이 핀 곳에 아우 효명이 또 암자를 짓고 머무르면서 저마다 부지런히 불도를 닦았다. 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에 올라 예를 올리려 하던 차에 동쪽 대인 만월산에 1만 명의 관음보살 진신이, 남쪽 대인 기린산에는 여덟 분의 큰 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서쪽 대인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북쪽 대인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00 명의 대아라한이, 중앙의 대인 풍로산은 혹은 지로산이라고도 하는데 비로자나부처를 우두머리로 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었다. 이와 같은 5만 명이나 되는 보살의 진신께 일일이 예를 올렸다. 매일 새벽이면 문수보살이 진여원, 즉 지금의 상원에 와서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하여 나타났다.때로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보주 모양이 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부처의 눈 모습으로도 된다.또는 부처의 손 모습으로도 되고, 혹은 금종 모양, 또는 신통 모양, 또는 금으로 된 누각 모습이 되기도 한다.또 금륜형 모양, 혹은 금강저 모양, 금으로 된 항아리 모양, 금비녀 모양, 혹은 부처의 발 모양, 번개 모양, 여래가 솟아오르는 모양, 지신이 솟아오르는 모양으로도 됐다. 두 태자가 매일 골짜기의 물을 길어와 차를 달여 올리고 밤이 되면 각자 암자에서 수도했다. 문수보살이 때로는 보천의 이마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으로 성도기별을 주기도 했다.보천이 세상을 떠나는 날, 후에 이 산중에서 시행할 행사로서 국가에 도움이 될 일들을 기록하여 남겨 놓았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 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보살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다.청색 방위인 동쪽 대의 북쪽 귀퉁이 아래, 북쪽 대의 남쪽 기슭 끝에 마땅히 관음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관음보살상과 푸른 바탕에 1만 명의 관음보살상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금경과 인왕반야경과 천수다라니를 읽고 밤에는 관음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원통사로 하라. 적색방위인 남대 남쪽면에는 지장방을 설치해 원만한 모습의 지장보살과 붉은 바탕에 8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점찰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금강사라 하라. 백색방위인 서대의 남쪽 면에는 미타방을 설치해 원만하신 모습의 무량수여래와 흰색 바탕에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여덟 권의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아미타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수정사라 하라. 흑색방위인 북대의 남면에는 나한당을 설치하고 원만하신 석가여래상과 검은 바탕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 나한을 그려 모시도록 하라.법력이 높은 승려 다섯 명으로 하여금 낮에는 불보은경과 열반경을 읽도록 하고 밤에는 열반경 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백련사라 하라. 황색방위인 중대의 진여원에는 가운데에 문수보살과 부동명왕의 소상을 모시고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서른여섯 가지로 변화하는 형상을 그려서 모시도록 하라.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낮에는 화엄경과 육백반야경을 읽고 밤에는 분수예참을 외우게 하며 그곳을 화엄사로 하라. 보천암을 고쳐 화장사라 하고 원만하신 모습의 비로자나삼존과 대장경을 모셔라.법력 있는 승려 다섯 분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화엄신중을 외우게 하라.해마다 100일 동안 화엄회를 베풀고 그곳을 법륜사라 하라.이 화장사를 오대사의 본사로 삼아 굳게 지키도록 하라.행실이 깨끗하고 법력이 높은 승려로 하여금 경건하게 길이 공양을 하게 하면 국왕이 천추를 누릴 것이며 백성이 평안할 것이고 문무가 모두 화평하며 온갖 곡식이 풍성할 것이다. 또 하원에 문수갑사를 더 배치해 결사의 본산으로 삼고 법력 있는 승려 일곱 분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항상 화엄신중의 예참을 행하게 할 것이다.이상 승려 37명이 재에 쓰는 비용과 의복의 비용은 하서부의 도내 여덟 고을의 조세로써 네 가지의 일에 들어가는 자금으로 충당할 것이다.이렇게 대대로 임금이 잊지 않고 받들어 행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신문왕 폐비의 한신문왕은 왕위에 올라 1년이 되지 않은 상복을 입고 있는 때에 김흠돌의 반란조짐을 알아채고 일당을 잡아 사형을 집행했다.반란의 수괴였던 김흠돌의 일족과 동조했던 무리들도 3~4일만에 모두 잡아 처형했다.김흠돌의 반란을 알면서도 징계하지 않았던 병부령도 그의 아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그러나 김흠돌의 딸이었던 왕비는 차마 참하지 못하고 궁궐에서 내쫓았다.당시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보천, 효명 왕자 형제는 곁에 두고 나라의 일을 살피도록 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폐비는 수모를 잊을 수가 없었다.특히 궁궐의 두 아들이 보고싶어 눈물로 나날을 보내며 수모를 갚을 일을 생각했다.폐비는 궁궐에서 손이 닿지 않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아무도 몰래 군사를 길렀다.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었던 윤홍 장군이 주축이 돼 흩어졌던 세력들을 하나하나 규합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보천과 효명태자 형제는 신문왕 말기에 훈련을 핑계로 강원도지역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해후했다.두 태자의 어머니 폐비는 신문왕이 죽기 직전에 먼저 세상을 등졌다. 10년, 20년의 시간은 화살보다 빠르게 지나갔다.1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신문왕이 죽고, 김흠운의 딸 신목왕후에게서 난 이홍이 효소왕으로 즉위했다. 윤홍 장군은 효소왕이 어렸지만 신문왕이 심어놓은 세력들이 궁궐을 튼튼하게 지키고 있어 그들의 힘이 흩어진 702년에 거사를 일으켜 성공했다.보천은 이미 권력에 욕심을 버리고 불법에 귀화했다. 둘째 효명태자가 궁궐로 입성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2>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도 죽음을 앞두고 왕권 이양 이후 반란에 대한 불안감으로 고민이 컸다.이 때문에 왕은 눈을 감으면서도 왕위를 이을 아들에게 관 앞에서 바로 즉위할 것을 유지로 남겼다.문무왕이 걱정했던 것처럼 신문왕은 즉위하면서부터 김흠돌을 비롯한 반란세력의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왕은 왕비의 아버지이자 장인인 반란수괴 김흠돌의 목을 치고, 왕비는 반역자의 자식이라는 명분으로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쫓겨난 왕비에게서는 두 아들이 있었다.보천태자와 효명태자가 그들이다. 신문왕은 새로 맞은 왕비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임명해야 했다.왕비 세력의 강압 때문에 전 왕비의 아들에게 명했던 태자를 파했다.충격에 빠진 보천과 효명태자는 화랑들과 어울려 군사훈련에 몰입하다 오대산으로 잠적해버렸다. 신문왕이 죽고 7세에 불과한 효소왕이 왕위를 이었다.어머니 신목왕후가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나 폐비된 김흠돌의 여식을 둘러싼 세력들이 왕권에 도전해 왕실은 늘 불안했다.결국 효소왕은 11년 만에 김흠돌의 세력들에 의해 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삼국유사: 명주 오대산 보질도 태자 전기신라 정신왕의 태자 보질도가 그의 아우 효명태자와 함께 하서부에 있는 각간 세헌의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큰 재를 넘었다.그들은 각기 1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으로 가서 며칠을 유람하다가 태화 원년(648) 8월5일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무리들 가운데 시중을 들고 호위하던 자들이 샅샅이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 모두 서울로 돌아왔다. 형인 태자는 오대산 중대의 남쪽 아래에 있는 진여원 터 아래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거처했다. 아우인 효명도 오대산 북대의 남쪽 산 가장자리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역시 풀을 엮어 암자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두 형제는 예불과 염불로 수행하며 오대에 나아가 삼가 예배를 드리니 푸른색 방위인 동쪽 대의 보름달 모양의 산에는 관음보살의 진신 1만 명이 항상 머무르고, 붉은색 방위인 남쪽 대의 기린산에는 8대 보살을 우두머리로 1만 명의 지장보살이 항상 머물렀다. 또 흰색 방위인 서쪽대의 장령산에는 무량수여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대세지보살이 항상 머무르고, 검은색 방위인 북쪽대의 상왕산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500명의 대아라한이 항상 머물렀다. 황색 방위가 차지하고 있는 중앙대의 풍로산은 지로산이라고도 한다.이곳에는 비로자나를 우두머리로 1만 명의 문수보살이 항상 있었다.진여원 터에는 문수보살이 매일 이른 아침이면 서른여섯 가지 형상으로 변화해 현신하니 두 태자가 함께 예배했다.매일 아침 일찍 골짜기의 물을 길러 차를 달여 1만 명의 문수보살 진신에 공양했다. 정신왕의 태자이며 아우인 부군이 신라에서 왕위를 다투다가 죽임을 당하자 나라 사람들이 장군 네 명을 보냈다.그들이 오대산으로 가서 효명태자 앞에서 만세를 부르니 즉시 오색구름이 오대산으로부터 신라의 서울까지 뻗쳐 7일 밤낮 동안 광명이 떠돌았다. 나라 사람들이 빛을 찾아 오대산으로 가서 두 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보질도태자가 울면서 돌아가지 않으므로 효명태자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게 했다. 왕위에 있은 지 10여 년인 신룡 원년(705) 3월8일에 진여원을 처음 세웠다. 보질도태자는 골짜기의 영험한 물을 항상 마시더니 육신이 허공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도착하여 울진대국에 있는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다시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이나 도를 닦았다.오대산은 백두산의 큰 줄기로서 각 대에는 진신이 항상 머무르고 있다. ◆우통수와 장천굴 신문왕의 본처에게서 태어났던 보천태자는 외할아버지가 역적이 돼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는 왕궁에서 쫓겨난 이후 태자에서도 폐위되고 험한 길을 걸어야 했다.권력에 대한 허망함을 느끼고 밖으로 나돌다 오대산에 들어가 불법에 귀의해 버렸다.보천태자가 수련하면서 마시고 부처에게 공양했던 물을 우통수라 부른다.김시습의 시가 전한다. ▲생육신 김시습의 우통수‘서산의 높은 봉우리 외롭게도 끊겼는데/ 우통의 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상인은 병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우통의 정화수는 깨끗함이 옥 같은데/ 상서로운 향화는 바퀴같이 큼이라/ 희미한 여러 봉이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천신에게 공양하네.’ 보천태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완전히 불법에 귀의해 깨달음을 얻었다.오대산에서 울진 장천굴까지 날아다니며 수양했다. 그 장천굴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있는 석회동굴이다.지금은 총 연장 870m에 이르는 굴로 부처가 머물렀던 굴이어서 성류굴로 불리며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문무왕의 예언 일은 걱정하는 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문무왕의 걱정이 그랬다.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하고도 백성들의 평화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절절이 느꼈다.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 전쟁을 없애기로 마음먹고 전쟁터에서 죽을판 살판 칼을 휘둘렀던 문무왕이다.나라의 안녕과 백성들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왜구들뿐 아니라 권력을 향해 부질없이 욕심을 키우는 무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한 때부터 문무왕의 걱정은 속으로 커져갔다. 문무왕은 왜구의 침략도 걱정이 되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김흠돌 장군의 움직임에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병권의 3분의 1이나 거머쥐고 있는 김흠돌 장군이 모반의 뜻을 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나라는 순식간에 피바다에 잠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심증만으로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치는 척하는 장군을 감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문무왕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킬 터이니 동해 앞바다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하며 “왕좌는 한시라도 비워두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 있으니 내 관 앞에서 즉위식을 갖도록 하라”고 했다. 왕의 유지에 따라 정명은 아비의 주검 앞에서 왕관을 썼다.그리고 화장해 동해 앞바다에 장례를 치렀다.신문왕은 국상 중에 김흠돌이 난을 일으키는 정황을 포착하고 은밀하게 장군들에게 명하여 김흠돌 세력의 움직임을 샅샅이 파악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바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신문왕은 반란의 수괴 김흠돌 일당을 거사 하루 전에 모조리 잡아 들였다.왕은 장인이지만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김흠돌의 목을 가차없이 베었다.반란군의 딸인 왕비도 폐비하고, 왕궁 밖으로 내쫓았다.그러나 태자로 임명한 보천태자와 태자의 동생 효명왕자는 신문왕이 끔찍이 사랑해 곁에 뒀다. 보천과 효명 형제는 어머니가 쫓겨나고 외할아버지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고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나날이 맘을 졸였다.그러던 중 신문왕이 김흠운의 여식을 왕비로 맞아들이고, 새 왕비가 아들을 낳자 형제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새왕비의 친인척들이 왕실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태자 형제들에게 가하는 압박도 점차 수위가 높아지면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신문왕은 왕비세력의 압력에 굴복해 보천태자를 폐하고, 세 살 난 왕비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보천과 효명 형제는 스스로 외부군부에 나갈 것을 청했다.왕은 못이기는 척 형제들을 가까운 성에서 근무할 수 있게 인사조서에 명을 내렸다.두 형제는 군사훈련을 핑계로 강원도 지역을 순찰하던 중 군사들 모르게 오대산 깊은 곳으로 숨어버렸다. 형제는 왕권에 대한 욕심은 진작 버렸다.아비인 신문왕이 수시로 형제를 불러 근황을 물으며 걱정하곤 했지만 왕비 측근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때문에 세상살이에 대한 미련도 진작부터 버리고 싶었다.형제들은 권력에서 벗어나 마음이라도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산으로 숨어들어 부처님에게 귀의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자신의 마음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를 따르던 세력들이 암중에 힘을 키워 어린 효소왕의 세력이 내분을 일으켜 권력이 분산되는 기회를 틈타 왕권을 빼앗고, 효명태자를 왕으로 추대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기행단 2년 간의 여정 마무리

대구일보와 대구일보의 계열사(영상 콘텐츠 전문제작 업체)인 이노버즈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삼국유사기행단이 지난 12일 공모전 시상식에 이어 창립 2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삼국유사기행단은 이날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전했다는 청도 운문사 등을 돌아보며 올해 마지막 삼국유사 기행을 진행했다.이후 더케이경주호텔에서 삼국유사스토리텔링 시상식과 기념행사를 진행하며 2년 간의 여정을 되돌아 봤다.삼국유사기행단은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육성사업을 2년째 이어오고 있다.내년까지 이 사업을 추진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성화할 계획이다. 사업은 블로그를 통해 삼국유사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기행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스토리텔링한 내용을 실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또 삼국유사를 전공한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문화해설을 곁들여 삼국유사 기록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 기행으로 역사·문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이를 토대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기행단은 2년 간 육성사업을 통해 ‘새로 쓰는 삼국유사’라는 2권의 책을 펴냈다.이 책은 지역 문인, 여론 주도층,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전국의 공공 도서관 등에 배부됐다.또 네이버 등의 포털 사이트와 페이스북 등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스토리텔링한 원고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기업체와 사회단체 등이 삼국유사 토크쇼 및 특강을 요청할 만큼 삼국유사라는 문화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시상식에서 대상을 차지한 김은형 작가는 “특히 경주에는 기록적인 역사문화 자원이 널려 있지만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며 “스토리텔링을 통해 산업화 하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강조하며 첨성대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해석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대구일보는 내년에는 삼국유사를 활용한 문화콘텐츠 육성사업을 기행과 함께 소규모 세미나와 스토리텔링 공모전에 중점들 두고 영화와 드라마 등과 접목할 작품을 선별할 계획이다.이어 새로 쓰는 삼국유사 3권과 4권을 동시에 발간할 예정이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91>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자

월정사는 강원도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삼국유사는 오대산의 오대, 즉 동서남북대와 중대를 오대라 하여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다.각 대마다 오만의 진신이 거처해 친견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자장율사가 찾아왔고, 신효거사, 신라 신문왕의 아들, 신의두타, 유연 등의 성인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공부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월정사뿐 아니라 상원사, 적멸보궁, 원통사, 금강사, 수정사, 백련사, 화엄사, 법륜사 등의 절을 지어 향불을 피워 오대산은 신라 불교의 꽃을 피우는 성지로 전한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진신을 만나기 위해 거처하며 지었던 움막터에 신효거사가 절을 지으면서 지금까지 모습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지금의 월정사는 6.25전쟁 당시 불타고, 나중에 중건한 건물이다. 월정사 앞에는 팔각구층석탑이 높이 서 있고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앉아 있어 이채로운 풍경이다.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만든 석탑으로 다양한 불교문화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 문화자산으로 국보 제4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자절에 전해오는 옛 기록을 살펴보면 자장법사가 처음 오대산에 와서 진신을 친견하고자 이 산기슭에 움집을 짓고 머물렀다.7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서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 그 후에 신효거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한다.그의 집은 공주에 있었는데 어머니 봉양을 지극히 효성스럽게 했다.어머니가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거사가 고기를 구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활을 쏘았더니 그중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거사가 그 깃을 주워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여서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그 후에 그는 승려가 돼 그의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효가원이다.거사가 경주 땅에서 하솔(지금의 강릉)로 가서 깃으로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그래서 그곳에 머물러 살 마음이 생겨 길에서 나이 많은 아낙을 보고 어디가 살 만한 곳인가 물었다.아낙이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이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거사는 그말이 관음보살의 가르침임을 알고 곧 성오평을 지나 자장이 처음 움집을 지었던 곳에 머물렀더니 문득 다섯 명의 승려가 와서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거사가 어리둥절해 하자 승려가 “그대가 쥐고서 사람을 보는 깃이 바로 가사이다”고 했다.거사가 즉시 내어 주자 승려는 그 깃을 가사의 폭이 찢어진 곳에 가져다 대었는데 꼭 맞았다.그것은 깃이 아니라 바로 베였다.거사는 다섯 명의 승려와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성자들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움집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 신효거사가 와서 머물렀고, 그다음에는 범일의 제자인 신의두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머물렀다.후에 수다사의 법력이 높은 승려 유연이 와서 살면서 점차 큰절이 됐다. 절의 다섯 성자와 9층석탑은 모두 성스러운 유적이다.풍수가 “나라 안의 이름난 산 가운데 이곳이 가장 좋으니 불교가 길이 번창할 곳이다”고 말했다. ◆월정사월정사는 다섯 봉우리가 연꽃무늬를 만든다는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이 원시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전나무 숲길은 일주문에서부터 1㎞나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함께 자리했던 소나무들이 그 아름다운 기세에 눌려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부처님을 호위하듯 우거진 전나무 숲의 터널을 지나고,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누각을 차례로 통과하면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월정사가 나타난다.전쟁으로 불타버린 원래의 사찰터에 새로이 다듬은 절이 험한 산세 아래 엎드려 있다. 건물은 모두 6.25 전쟁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오대산의 푸른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듯한 사찰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은 품위와 기개가 느껴진다.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이어간 조선의 임금 세조는 하늘의 벌을 두려워 해 불교에 귀의하고 월정사를 수시로 찾아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 팔각의 2층 기단 위로 세운 9층석탑 앞에는 바닥에 꿇어앉아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있다.보물 139호로 지정됐다가, 2017년 국보 제48-2호로 승격됐다.익숙하지 않은 이형탑보다 꿇어앉은 석조보살상에 더욱 시선이 끌린다. 상원사로 가는 길고 깊은 길은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향하는 비밀의 통로인 듯 끝없이 가물가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옛 성인들이 걸었던 길이라 하여 ‘선재길’로 이름을 붙여 삼삼오오 찾는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선재길 물소리를 염불 삼아 걷다보면 저절로 세상사를 잊게 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월정사의 성인신라 선덕여왕 때 서라벌에 효자가 있었다.어머니를 신처럼 떠받들어 사람들이 신효(神孝)라 불렀다.신효는 어머니가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어 매일 사냥하는 것이 일이었다. 어느덧 사냥에 솜씨가 늘어 신효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하루는 노루를 보고 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아나 신효는 턱에 숨이 차도록 따라갔다.나중에는 지쳐 노루가 흘린 핏자국을 따라 쫓아갔다. 몇 구비를 돌아 가시나무 숲속에 엎드린 노루를 발견했다.그런데 신효는 화살을 맞은 노루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보고, 노루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부드러운 속옷으로 상처를 감싸주고 돌아왔다. 그날부터 신효는 활과 화살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사냥을 그만뒀다.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다리살을 베어 드렸다.그 다음날부터 신효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면 어김없이 매일 고기가 한 접시씩 놓여 있었다.화살 맞은 노루가 넘던 고개를 노루목이라 부른다. 신기하게 생각한 신효가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문틈으로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새벽이 될 무렵 목에 흰 천을 두른 사슴이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고기를 토해놓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이때부터 신효는 불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경전을 펼치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신효는 어머니가 죽자 집을 팔아 절을 지었다.신효는 7일 밤낮을 먹지 않고 기도했다.잠깐 조는데 꿈에 흰 천을 목에 두른 노루가 나타나 강릉으로 가면 전나무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절을 짓고 불법을 공부하면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잠에서 깨어난 신효는 벌떡 일어나 그길로 강릉쪽으로 걸어 전나무숲을 찾기 시작했다.오대산 초입에 들어서니 굴뚝새가 인사를 꼬박하더니 날지도 않고 총총 뛰면서 길을 안내했다.물길을 따라 오대산 깊숙이 들어오니 전나무들이 줄을 지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전나무로 절을 짓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로 공양을 했다.신효는 오대산에 들어온 날부터 매일 아침 동이 트는 방향의 산 정상 부위에 나타나는 부처를 향해 샘물을 길어 공양했다.7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샘물 공양을 하던 신효는 공양하는 모습 그대로 굳어 돌이 됐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 손으로 샘물을 떠받들어 받치는 모습이다.천상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후세에 사람들이 부처가 된 신효가 공양하는 앞에 진신사리를 안치한 탑을 세웠다.이곳이 월정사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 2021년도 예산‘3천385억 원’편성  

군위군은 전년도 대비 68억 원(2.05%) 증가한 3천385억 원 규모의 예산안을 편성, 군의회에 제출했다. 일반회계는 올해보다 83억 원 증가한 3천257억 원, 특별회계는 15억 원 감소한 128억 원을 편성했다.코로나19에 따른 재정충격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교부세가 대폭 감축되는 등 대내외적으로 재정여건이 불리할 것으로 전망되지만, 군은 자체세입을 확장적으로 추계하는 한편 세출분야에서의 경상적 경비 삭감과 회계 간 내부거래 등의 명목적 예산의 축소를 통해 예산안 편성에 내실을 기했다.세입별 주요 증가요인은 지방세 및 세외수입 2억 원, 국·도비 보조금 207억 원이고, 감소요인은 지방교부세 및 조정교부금 76억 원, 보전수입 및 내부거래 65억 원으로 사회복지 수요증가에 따른 국·도비 보조금 증액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분석된다.분야별 세출예산 규모를 살펴보면 농림해양수산분야에 700억 원(20.67%), 사회·복지 분야 및 보건에 561억 원(17.55%), 환경 분야 487억 원(14.39%), 문화 및 관광 분야에 246억 원(7.28%), 교통 및 물류 분야에 173억 원(5.11%) 등에 배분해 편성했다.2021년 주요 사업으로는 기초연금지원 264억 원, 공익증진직접지불제 98억 원, 종합운동장 조성사업 76억 원, 노후상수도 정비사업 64억 원, 농어촌생활용수개발사업 55억 원, 노인일자리사업 50억 원,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 리모델링 35억 원, 의흥~고로 간 도로개설 28억 원, 군위역사 진입도로개설 20억 원 등이다.군위군은 코로나19로 인한 지역경기 침체를 극복하고 재정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연례 반복적이고 불요불급한 사업에 대해서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연내 실행될 수 있는 사업을 우선적으로 편성했다는 평이다.권성태 기획감사실장은 “예산이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주민 복지 증진에 직결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한편, 2021년도 예산안은 제253회 군위군의회 제2차 정례회 심사를 거쳐 다음달 16일에 최종 의결·확정될 예정이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9) 천룡사

경주 남산 중턱에 위치한 천룡사는 창설에서부터 부처의 공덕까지 다양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 신라 유명사찰이다.최근 사찰터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천룡사라는 글이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돼 천룡사의 존재는 분명하게 확인됐다. 또 천룡사 터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을 복원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석탑과 건축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당시 석재들을 많이 모아두고 있다.그러나 여전히 많은 석재들이 절터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다.특히 대형 석조는 발굴되었지만 절터 마당 한구석 땅속에 묻혀있어 아는 사람의 설명이 없으면 찾아볼 수도 없다. 신라시대 당나라의 장수 악붕구가 사신으로 왔다가 천룡사가 무너지면 신라는 며칠 내로 멸망에 이를 것이라고 예언할 정도로 천룡사는 대내외적으로 무게감이 컸던 중요 사찰로 전해진다. 그렇지만 아직 석탑 복원 이외에는 이렇다 할 정비복원사업이 진행되지 않을 뿐 아니라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고 있어 사학자들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만 메아리로 울리고 있다. ◆삼국유사: 천룡사경주의 남산 남쪽에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세상에서는 고위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절이 있는데 세속에서는 고사 또는 천룡사라고 한다. 토론삼한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계림 땅 안에는 딴 곳에서 발원해 흘러들어온 강물이 두 줄기가 있고 거슬러 오르는 강물 한 줄기가 있다. 그 역수와 객수의 두 근원이 하늘의 재앙을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무너져 앉는 재앙이 있게 되리라.’ 또 세속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역수란 것은 고을의 남쪽 마등오촌의 남쪽을 흐르는 시내가 바로 이것이다. 또 이 물의 근원이 천룡사로 돼 있다.’중국의 사신 악붕구가 와서 보고 말하기를 “이 절이 파괴되면 며칠 못 가서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 했다. 또 다음과 같이 서로 전하는 말이 있다.옛날에 한 신자의 집에 천녀와 용녀라는 두 딸이 있었다.부모가 두 딸을 위해서 절을 지으니 절의 이름은 여기서 연유한다. 천룡사는 경내가 신이해 불도의 성취를 돕는 곳인데 신라 말에 피폐해 허물어진 지 오래됐다.중생사의 관음보살이 젖을 먹여 기른 최은함의 아들이 승로인데 승로가 숙을 낳고, 숙이 시중 제안을 낳았다.제안이 바로 허물어진 절을 중수하여 일으켰다. 그리고 석가만일 도량을 설치해 조정의 뜻을 받아들였다. 겸해 그의 기록과 발원문을 절에 남겨 두었다.그는 죽어서 절을 지키는 신이 되어 자못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을 많이 나타내었다.절에 남긴 기록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단월 내사시랑 동 내사문화평장사 주국 최제안이 글을 쓴다.경주 고위산 천룡사가 피폐하여 허물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다.제자가 특별히 임금님의 만수무강과 백성과 나라가 평안하고 태평하기를 발원해서 불전, 불당, 회랑, 전각, 방, 숙소, 주방, 창고 등의 공사를 일으켜 다 마쳤다.돌과 흙으로 빚어 여러 구의 부처를 만들고 석가만일도량을 개설했다. 이미 나라를 위해 중수했으니 관청에서 주지를 임명하는 것도 좋으나 사람이 갈려 교대를 할 때에는 도량의 승려들이 안심할 수가 없다. 곁에서 보건대 시주받은 전답으로 절의 경비를 충족한 것을 보면, 팔공산의 지장사 같은 곳은 들어온 전답이 200결이고, 비슬산 도선사는 들어온 전답이 20결이며, 서경의 사면에 있는 산사들도 각각 20결씩이다.이들 절에서는 모두 직책이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반드시 계율을 갖추고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뽑아서 절에서 여러 사람이 원하는 것에 따라서 여러 차례 주지를 시켜 분향의 예를 올리고 수도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았다. 제자는 이 풍습을 듣고 기뻐해 우리 천룡사도 역시 절의 여러 스님 중에서 재주와 덕망이 함께 뛰어난 큰스님으로 기둥이 될 만한 사람을 뽑아 주지로 임명해 길이 분향 수도하려 한다.문자로 자세히 기록해 행사 책임자에게 맡기니 이번 주지부터 시행할 것이며, 유수관이 문서를 받아 도량의 여러 스님에게 보일 것이니 각자 자세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중희 9년(1040) 6월 관직을 갖추어 앞의 것과 같이 서명했다.살펴보면 중희는 곧 거란 홍종의 연호이니, 고려 정종 6년 경진(1040)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천룡사의 붕괴천룡사는 신라시대 남산 중허리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창건했는지 인근 지역 주민들도 절의 내력을 모른다. 더욱 신비스런 것은 주지스님의 행적이다. 천룡사의 주지스님은 분위기부터 묘하다. 남산에서 자생하는 나무, 갈대 등의 초목 껍질을 벗겨 얼기설기 기워서 만든 옷으로 사시사철 장삼으로 걸치고 다닌다. 그가 쓰는 모자는 24시간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마치 풀잎처럼 머리 위를 덮고 있어 산속을 거닐 때면 그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의 행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눈과 코를 제외하고 수염이 뒤덮어 가슴까지 드리워져 있다. 염불을 외거나 밥을 먹을 때도 그의 입술은 수염에 가려 볼 수 없다. 그는 밥 먹을 때와 염불할 때 외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는다. 입이 무거워 묵언스님으로도 불리며, 고위산 아래 홀로 다닌다 해 고독스님으로 통한다. 절을 찾는 신도들은 편한대로 묵언, 고독스님 등 그때그때 부르는 사람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른다. 스님은 호칭에 대해서도 일절 토를 달지 않는다. 스님의 나이도 모른다.언제부터 천룡사에 주석하고 있는지조차 인근 마을의 주민들도 모른다.일설에는 스님의 나이는 백살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고독스님은 가끔씩 엉뚱한 예지력을 발휘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이 때문에 현실이 답답하거나, 큰 사업을 하기 전에 충고를 얻기 위해 천룡사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법당은 신도들보다 찾아오는 손님들로 늘 북적거렸다. 천룡사에 신도와 방문객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법당에 스님이 혼자 부처님 앞에서 염불만 하고 탁발을 하지 않았다.찾아와 시주하는 이도 없고, 스님이 농사도 짓지 않았으나 쌀독에는 늘 쌀이 가득했다. 또 마당 한가운데 놓인 큰 석조에는 샘을 파지 않아도 항상 깨끗한 물이 찰방찰방 넘치도록 가득했다.아무리 많은 손님들이 퍼마셔도 석조의 물은 항상 넘쳐흘렀다. 어떤 이는 생명수라고 하며 매일 석조의 물을 퍼마시고 떠갔다.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면 천룡사에서 먼저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문무왕이 죽기 전날 천룡사 불상이 소리 내어 울며 눈물을 흘려 법당이 흥건했다.또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천룡사 삼층석탑이 와글와글 소리 내며 흔들리다가 3층 이상의 모든 석재가 무너져내렸다. 이러한 변고는 주지스님 뿐 아니라 천룡사를 찾아왔던 신도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경험하고, 지켜보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고을마다 소문이 번져 복을 빌기 위해 찾는 발길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천룡사의 신비스런 사실들이 전해지면서 나라에서도 절을 경영하는데 필요한 쌀을 비롯한 모든 경비를 지원하면서 왕실의 복운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도록 했다.또 왕은 고독스님을 국사로 초빙했지만 응하지 않고 오직 천룡사에서만 불법을 강의했다. 신라 55대 경애왕이 즉위할 즈음을 전후해 천룡사는 수시로 천둥소리를 내며 울었다.나라에 큰일이 벌어질 것을 걱정해 짐을 싸 피난 갈 준비를 하는 백성들이 생길 정도였다. 이러한 소문은 왕실에도 전해졌지만 경애왕은 귓등으로 듣고 별다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다. 후백제 견훤이 군사들을 이끌고 영천지역까지 내려와 주둔할 때, 신라왕경으로 공격을 개시하기 정확하게 3일 전, 천룡사는 천둥치는 소리로 크게 울다가 기둥이 하나도 남지 않고 폭삭 쓰러져 붕괴됐다. 신비스런 것은 마을사람들과 신도, 방문객들이 무너진 금당을 정비하는데 불상도 없고, 묵언스님도 흔적없이 사라지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 어디에서도 묵언스님을 본 사람은 없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88)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는 경주시가지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국도로 30여 분 달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원성왕릉의 동북쪽 1㎞ 정도 가깝게 연접해 있다.왕족이 부모님을 비롯해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719년에 세운 절이다. 특히 이 절터에서 발견된 미륵불과 아미타불은 뒷면에 불상과 절을 지은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또 조성연도를 기록한 유일한 불상으로 예술적 작품성이 뛰어나며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고 문화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지금 감산사 대적광전에는 훼손된 모습을 복원한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협시불도 없이 혼자 앉아 있다.대적광전 뒤뜰에는 2층과 3층의 몸돌이 사라진 신라시대 전형적인 형식을 갖춘 삼층석탑이 복원되어 왕실의 복을 빌었던 존엄을 고고하게 증언하고 있다. ◆삼국유사: 남월산 감산사 감산사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금당의 주 부처인 미륵존상의 화광 후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개원 7년 기미(719) 2월15일에 벼슬이 중아찬인 김지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해 공경스런 마음으로 감산사 절 한 채와 석미륵 하나를 만들었다. 아울러 개원이찬과 아우 양성소사와 현도법사와 누이 고파리, 전처 고로리와 후처 아호리 및 서형 급한일길찬과 일당살찬, 총민 대사와 누이동생 수힐매리 등을 위해 좋은 일에 앞장섰다.어머니 관초리 부인이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 미타불의 광배 뒷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중아찬 김지전은 일찍이 상사봉어와 집사시랑으로 있다가 67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히 지내면서 나라의 주인인 대왕과 이찬 개원,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인 인장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죽은 아우, 소사 양성, 사문 현도, 죽은 처 고로리, 죽은 누이 고파리, 그리고 처 아호리 등을 위하여 감산의 농장을 희사하여 절을 세웠다. 또 돌로써 미타상 하나를 만들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일길찬을 위해 받들어 모셨다.그가 고인이 되자 동해 흔지가에 뼈를 뿌렸다.임금의 계보를 보면 김개원은 바로 태종 김춘추의 여섯째 아들 개원각간이니 곧 문희가 낳았다.김지전은 인장일길찬의 아들이다. 동해흔지는 아마 법민을 동해에 장사 지냈다는 말인 듯하다. ◆감산사의 보물 감산사에서 국보 2점을 비롯해 여러 문화재가 출토됐다.일제강점기에 미륵불과 미타불은 원형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돼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국보로 지정 전시하고 있다.또 대적광전에 안치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좌상과 몸돌을 포함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복원된 삼층석탑도 지역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국보 제81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전체 높이가 2.52m로, 상당히 이국적인 풍모를 지녔다.살짝 비튼 몸, 화려한 장엄, 길게 드리워진 영락 장식, 몸에 밀착된 군의(치마) 등은 불상에서 처음 나타나는 표현들로 이색적이다. 불상은 머리에 화려하게 장식된 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목에는 2줄의 화려한 목걸이가 새겨져 있고, 목에서 시작된 구슬 장식은 다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오른팔에 감긴 채 아래로 늘어져 있다.허리 부근에서 굵은 띠장식으로 매어 있는 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발목까지 내려오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배 모양이다.3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했다.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광배 뒷면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이 글을 통해서 만들어진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돌로 만들었음에도 풍만한 신체를 사실적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새로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석조아미타불입상은 국보 제82호로 지정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전시하고 있다.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인체 비례에 가까운 사실적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성이 돋보이는 불상이다. 불상의 얼굴은 풍만하고 눈, 코, 입의 세부표현도 세련되어 신라적인 얼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신체는 비교적 두꺼운 옷 속에 싸여 있어 가슴의 두드러진 표현은 없지만, 당당하고 위엄이 넘쳐 부처님의 모습을 인간적으로 표현했다.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온 몸에 걸쳐 U자형의 옷 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목에는 한번 뒤집힌 옷깃을 표현했는데 이는 신라 불상의 특징으로, 불상의 전체적인 형태와 함께 불상을 박진감 있게 보이게 한다.불상의 몸체 뒤의 광배는 배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무늬를 새겼다.광배 안에는 3줄의 선을 도드라지게 새겨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구분하며, 몸광배 안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미륵불과 같이 맨 아래는 8각이고, 활짝 핀 연꽃무늬를 간략하고 큼직하게 새기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이상적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불상으로 손꼽힌다.광배 뒤의 기록에 의해 만든 시기와 만든 사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불상으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감산사지 삼층석탑은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9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절터 동쪽에 자리한 삼층석탑은 2중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이 얹힌 전형적인 신라후기 석탑이다.오랜 세월의 풍파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던 것을 1965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1층 탑신은 약간의 부분 파손이 있고 2층과 3층 탑신은 없어 옥개석이 포개어진 채 복원됐다. 탑 옥개석은 4단 받침이며 추녀가 살짝 들려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이다.탑 꼭대기는 머리장식을 받치던 네모난 받침돌이 남아있다.옥개석 아래 부분에 홈을 파 물 흐름을 방지하는 형식이 특이하다. 감산사 대적광전에 안치돼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경북지방유형문화재 318호 지정 관리되고 있다.협시불도 없이 혼자 불단을 지키고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은 화강암으로 만든 신라 후기 불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는 약 1m, 지긋이 아래를 내려다보는 평화로운 얼굴 표정이다. 눈과 코, 입, 머리, 육계가 제대로 남아 있다.머리는 깨졌던 것을 다시 복원했고 광배와 대좌는 새로 만들어 고색의 향기가 묻어나는 석불과는 다소 대조적인 모습이다.어깨는 듬직해 보이고 두 손은 지권인을 취하고 있는데 근래 보수한 것이다. 현재 비로자나불 중에 거의 초창기 불상이며 등에 조각된 띠매듭은 석불의 옷주름을 연구하는데 중요자료가 된다.등 뒤로 아미타불탱화가 빛깔 곱게 채색돼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감산사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외교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전쟁에서 전술과 전략을 구사하는 능력도 탁월했다.김춘추는 전쟁터에서 김유신과 함께 하면서 전략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무력행사는 김유신을 앞세워 대부분 이기는 전투를 했다. 김춘추는 승리한 전쟁터에서 가끔 우연처럼 여인을 취하곤 했다.이 때문에 그의 자녀들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전생의 인연인 듯 딸과 사위를 잃은 전쟁터에서 만난 여인에게서 아들을 뒀다.김춘추는 끝내 이 부인과 아들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음지에서 돌보며 지원했다.그 아들의 이름이 김지성이다.때로는 김지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성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근골이 아비를 닮아 훤칠하게 빼어나 준수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이 때문에 김춘추는 더욱 그를 숨겨 키워야 했다. 부인들과 다른 아들들의 시기심으로부터 지켜주고 싶어서였다. 김지전은 어려서는 자신이 왕족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김춘추가 그의 어머니에게 당부한 탓에 신분을 모르고 자랐다.지전은 왕이었던 아비 김춘추가 죽은 이후에야 어머니로부터 왕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지전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무술 실력으로 상당한 지위까지 올라 나라의 일을 보는 신하로 인정을 받았다.그러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67세가 되던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불교에 심취하며 자연에 묻혀 지냈다. 그렇지만 인연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절을 짓고, 미륵불과 아미타불을 아름다운 솜씨로 빚어 불전에 모시고 후손들이 길이 명복을 빌게 하는 터를 마련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기행단 경주 감산사와 천룡사지 답사

대구일보와 이노버즈가 운영하는 삼국유사기행단이 지난 14일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가자를 25명으로 제한해 경주 감산사와 남산 천룡사지를 탐방했다. 삼국유사기행단은 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문화콘텐츠를 개발 육성하고자 매달 1회 문화유적 답사를 진행한다. 기행단은 황룡사역사관 주차장에서 출발해 길게 신라 성덕왕 때인 719년 중아찬 김지성이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경주 외동 괘릉리에 지은 감산사를 방문했다. 특히 감산사에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조성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된 불상으로 귀중한 사료가 되는 국보 문화재가 출토된 후 문화재 전문가들의 관심이 감산사로 쏠리고 있다.국보 81호와 82호로 지정된 미륵불과 아미타불 입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지금 감산사에는 2층과 3층 몸돌이 유실되고 곳곳에 훼손이 심하게 진행된 경북도문화재자료 95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대적광전에 안치된 유형문화재 제318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문화재로 남아 있다. 기행단은 서남산 틈수골로 방향을 틀어 천룡사지로 산행을 했다. 삼국유사에서 천룡사는 최은함의 손자 최제안이 허물어진 절을 새롭게 고쳐 중건한 것으로 소개한다.옛말에 신자의 집에 천녀와 용녀라는 딸을 위해 절을 지어 이름을 천관사라 불렀다는 설도 기록하고 있다. 또 중국 당나라의 사신 악붕구가 “이 절이 파괴되면 며칠 못가서 신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는 내용도 담아 천룡사의 신비스런 힘에 대해서도 전했다.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자각으로 문화가 창조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신라시대의 뛰어난 문화예술작품들도 중국이나 고구려, 백제 등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다”고 설명했다. 삼국유사기행단은 12월12일 청도 운문사 등을 버스를 대절해 돌아보고, 오후에는 삼국유사 스토리텔링 공모전 시상식과 함께 송년행사를 끝으로 올해 기행을 마무리할 계획이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군위군의 ‘고로면’→‘삼국유사면’, 내년 1월1일부터

군위군이 내년 1월1일부터 ‘고로면’이 ‘삼국유사면’으로 바뀌는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서고 있다.고로면은 1914년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지역 정체성과 주민 동의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지배편의를 위해 일방적으로 지은 이름이다.군위군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저술한 인각사가 있는 지역의 역사성을 브랜드화하고자 삼국유사면으로 행정구역 명칭을 바꾼 것이다.군위군은 고로면사무소 건물 외벽에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역민과 관광객들에게 명칭 변경을 알리고 있다.권상규 고로면장은 “군위가 명실상부한 삼국유사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삼국유사면이라는 새 명칭을 널리 홍보하겠다”고 말했다. 배철한 기자 baec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