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디딤돌로…식당 창업성공기 (상) 모시모시식당 박대현씨

대구시가 청년들의 외식업 창업을 위한 실전 경험의 장으로 ‘청년 팝업레스토랑(한시적 운영 식당)’을 운영 중이다.중구 종로에서 3개월 동안 청년들을 위해 무상으로 점포를 빌려준다.청년들은 이 기간에 컨설팅과 각종 교육을 무료로 받고 소중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임대료, 인테리어, 주방기기, 홍보 등 일체의 비용을 대구시에서 지원하고 청년들은 재료비와 세금만 내면 된다.청년 팝업레스토랑이 문을 연 지 1년이 지났다. 그동안 1기와 2기 운영자들이 배출됐다.청년 팝업레스토랑 덕에 실패를 넘어 창업에 성공한 사장님들을 만나봤다.“오늘은 비가 와서 저녁에 국물을 찾는 손님이 많을 것 같습니다. ‘나베’류 재료를 평소보다 더 손질해 놓으려고 합니다.”지난 7일 오후 5시께 경산시 정평동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씨에 박대현(40)씨는 저녁 장사에 사용할 재료 손질에 여념이 없었다.경산시 정평동에서 ‘모시모시식당’을 운영하는 박씨는 대구시가 운영하는 ‘청년 팝업레스토랑’ 2기 출신이다.현재 그의 가게는 경산에서 ‘일식 맛집’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일식 경력만 20년이 넘었다는 그는 자신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박씨는 어려서부터 오직 요리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일본으로 요리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수많은 요식업 아르바이트를 하며 요리의 기초를 닦았다.그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경남 김해에서 창업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영업 부진으로 바로 가게를 접고 지인의 소개로 서울의 한 일식당에 취업했다. 이 식당에서 6개월을 일하다가 다시 친구와 동업 형태로 대구 복현동에 초밥집을 차렸다.영업 부진으로 허덕이던 그는 결국 이번 가게도 접고 창업의 꿈을 잠시 내려놓은 채 일식집에 취업했다.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내 가게’에 대한 꿈은 접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것이 대구시의 청년 팝업레스토랑 공고. 그때 박씨의 나이는 39세였다.“지금 제 나이가 청년이 맞는지 조금 헷갈렸어요. 그래서 알아보니 40세까지는 청년으로 인정해준다고 해서 부끄럽지만 지원했습니다.”물론 아내의 반대도 있었다. 하지만 박씨의 창업에 대한 꿈과 열망을 듣고는 아내도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며 허락했다.우여곡절 끝에 시작한 청년 팝업레스토랑 또한 처음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장기인 활어회를 메뉴로 선정했지만 가게운영을 해보니 재료의 신선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고민 끝에 메인메뉴였던 활어회와 회덮밥을 뺐더니 매출이 폭락했다. 시행착오 끝에 회덮밥을 고기 덮밥으로 교체했고 건강 문제로 쉬고 있던 아내가 홀을 맡아주면서 가게가 안정되기 시작했다.3개월 청년팝업레스토랑 체험을 끝내고 현재 그는 집과 가까운 경산시 정평동에 가게를 차렸다. 체험 때 가장 인기 있었던 것 위주로 메뉴를 선정했고 홀 관리와 주방 역시 그때의 경험을 발판삼아 운영 중이다,박씨는 “청년 팝업레스토랑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를 통해 실패를 경험할 수 있었다”며 “막연하고 실패로 가득했던 제 꿈을 현실화시킬 수 있었다. 실패를 통해 배운 것은 책으로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이승엽 기자 sylee@idaegu.com

(시리즈)가정의 달, 헌신과 희생의 이름으로 (1)뇌출혈 시어머니 18년 모신, 배윤자씨

한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를 떠올렸을 때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 있을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가족 간 헌신적인 사랑으로 화목한 가정의 정의를 보여주는 가족들을 만나본다.“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만 떠올리면 함께했던 추억이 아른거려 눈물이 납니다.”배윤자(61)씨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함께한 추억을 회상하며 이같이 말했다. 시어머니(당시 62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무려 18년간 이어진 병간호였다.몸을 가누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목욕, 이발을 시켜드리는 등 시어머니의 손과 발이 돼줬다. 시어머니의 기저귀를 살 돈도 마련하기 어려웠던 배씨는 천 기저귀를 직접 떠 사용하기도 했다.울릉도에서 태어난 배씨는 씩씩한 대장부 성격을 지닌 어머니와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밑에서 컸다.23세의 나이에 대구로 시집을 오게 되면서 다정하고 온화한 시어머니의 성격에 반해 더욱 따르며 지냈다.시어머니가 쓰러지고, 장남이었던 남편의 뜻에 따라 시어머니를 모시기 시작했다.허리 디스크 수술을 재차 받는 등 배씨는 허리가 불편했지만,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거나 간병인을 두지 않았다.배씨는 “시어머니와 함께해 든든하고 행복했다. 시어머니에게 치매 증세가 나타나고 대화가 어려웠지만, 시어머니와 감정적으로 서로 많은 것을 교감했다. 휠체어를 타고 동네 공원이라도 한 바퀴 돌 때면 그때마다 시어머니도, 나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말했다.그는 지금도 빨갛게 익은 홍시만 보면 홍시를 좋아하셨던 시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진다고 했다.배씨는 “홍시를 구해와 입에 넣어드리는 날이면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남편 역시 어머니가 답답해할까 업어서 계곡을 찾는 등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배씨는 곁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 음악을 들려드리고 춤을 추며 지루함을 달랬다.배씨는 “아픈 어른을 모시고 멀리는 갈 수 없었지만, 남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계곡, 바다, 공원 등 지역 근교에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다”고 말했다.지극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돌본 공로는 2015년 4월 보화상 수상으로도 이어졌다.그는 시어머니를 모시며 봉사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생긴 이후로는 꽃꽂이, 요리, 노래 등을 배워 독거노인 등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고 있다고 했다.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인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대구곰두리봉사협의회에서 독거노인 도시락 제공, 발달장애인·시각장애인의 외출 돕기 및 차량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배씨는 “시어머니를 봉양한다는 마음보다 시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울 수 있었기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베푼 것 뿐”이라며 “시어머니와 함께 한 추억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구아영 수습기자 ayoungo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