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74 가섭불연좌석

삼국유사 9편 중 네 번째가 탑상편이다. 탑상은 30여 꼭지의 탑과 불상에 대한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탑상편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글이 가섭불연좌석이다. 가섭불은 석가모니 이전의 일곱 부처 중 여섯 번째 부처로 석가모니의 스승이라고도 전한다. 가섭불연좌석은 가섭부처가 앉아 참선하던 자리라는 뜻이다. 황룡사에 가섭불이 참선하던 자리가 있다고 일연스님이 소개한 것이다. 신라는 불교와 일찍부터 인연이 지어진 땅이다. 석가모니 이전부터 칠불이 신라 일곱 곳의 절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려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난 흔적이 지워지고 있다. 금당의 주춧돌이나 불상을 떠받치고 있었던 대좌, 탑의 기초석과 같은 석물들에서 지나간 시대의 일들을 유추해 볼 뿐이다. 가섭불연좌석 또한 삼국유사 기록이 남긴 오랜 시간 이전의 사실들을 더듬어보게 하는 단초가 된다. 어떠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부처일까. 한 겹씩 벗겨보는 학자들의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면서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불가사의한 이야기, 가물가물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희미하게 남은 흔적에서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의 연좌석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본다.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전기에서 모두 “신라 월성 동쪽의 용궁 남쪽에 가섭불 연좌석이 있다. 이 땅은 석가모니 이전 시대의 절터였다. 지금 황룡사 땅은 곧 일곱 절터 중 하나”라고 하였다. 국사에는 “진흥왕 즉위 14년 개국 3년은 계유년(553)인데 2월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황룡이 그 땅에 나타나자 왕이 의아하게 여겨 황룡사로 고쳐지었다. 연좌석은 불전의 뒷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찍이 한번 뵌 적이 있다. 돌의 높이가 대여섯 척은 되고, 둘레가 거의 세 주쯤 되는데, 깃대처럼 우뚝 서 있고 이마 부분은 평평했다. 진흥왕이 절을 지은 다음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는 깨진 곳이 있었다. 절의 승려가 철을 발라 보호하고 있었다. 찬한다. 지나온 부처님의 시대 다 적지 못하나/ 오직 연좌석은 남아 의연하구나/ 뽕나무밭은 몇 번이나 바다로 변했던가/ 외로이 우뚝 서 상기도 변함없네. 얼마 후 몽고군의 침략을 받은 다음 불전과 탑은 타버렸고, 이 돌 또한 매몰되어 거의 땅 높이와 비슷해졌다. 아함경을 살펴보자. “가섭불은 현겁의 세 번째 부처님이시다. 사람 나이로 2만세 때에 세상에 나타나신다.” 이를 근거로 증감법을 가지고 계산해보자. 성겁의 처음에 매번 모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사셨다. 점점 줄어서 나이가 8만세에 이르렀을 때가 주겁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백년에 1세를 줄여 10세를 누리셨을 때 1감이 되며, 또 늘어나 사람의 나이 8만세에 이르렀을 때 1증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감과 20증이 1주겁이다. 1주겁 가운데 1천 분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온다. 지금 우리 스승 석가는 네 번째 부처님이시다. 석가세존부터 지금 지원 18년 신사년(1281)까지는 세월이 벌써 2천2백30년이다. 구류손불로부터 가섭불을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몇만 년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조정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문이 역대가를 지었는데 “금나라 정우 7년 기묘년(1219)으로부터 거꾸로 세어서 4만9천6백여 년에 이르면 반고가 개벽한 무인년이다”라고 했다. 여러 경전을 살피건대 가섭불 때부터 지금까지가 이 돌의 수명이다. 그러나 겁초 개벽할 때부터 시간에 비하면 어린애다. 세 사람의 설명이 이 어린 돌의 나이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개벽설에 대해서 몹시 소홀했던 것 같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가섭불 연좌석신라 눌지왕 때 왕궁의 동쪽에 용궁사라는 절이 있었다. 용궁사 앞뜰에는 넓은 연못이 있었고, 황룡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절의 주지는 가섭이라는 스님으로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도인처럼 생긴 모습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가섭은 평소 찾아오는 손님들과 일상적인 대화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며 상대를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절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가섭은 낮에는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는 절 뒤편에 사람 키 높이의 돌기둥 위로 올라가 날이 밝을 때까지 참선에 들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또 어떤 날은 3일 밤낮으로 석주에서 기도하며 내려오지 않았다. 가섭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그에게 지도받으려는 승려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용궁사는 서라벌의 백성들은 물론 국내외에서 몰려드는 사람으로 북적거리며 서라벌의 중심이 되자 왕실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때 바다 건너 천축국에서 여러 승려들이 용궁사로 찾아와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중 귀가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며 기이하게 생긴 싯달타라는 승려가 있었다. 싯달타는 가섭과 문답을 시작하면 하루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몰입했다. 그가 후에 부처가 되었던 석가모니다. 눌지왕 당시에는 고구려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백제와 왜는 첩자를 보내와 정탐하며 수시로 국경을 침범해 오는 통에 적대관계에 있었다. 용궁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비자 왕궁에서는 백제 등의 첩자들이 활동하는 근거지가 될 것으로 우려해 감찰부에서 조사를 했다. 사실 용궁사에는 백제와 왜의 첩자들이 승려를 가장해 숨어들어 활동하고 있었다.가섭은 왕궁에서 민감한 반응이 나타나자 신도들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백제와 왜에서 오는 첩자들을 선별해 왕궁에 은근히 밀지를 넣어 알리기도 했다. 가섭은 또한 첩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신라를 떠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끝내 왜의 첩자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왕궁의 군사가 조사를 벌이는 과정에서 왜의 첩자 긴모리와 언쟁 끝에 조사하던 군사가 칼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실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전국의 사찰을 모두 문을 닫게 명령을 내렸다. 신라에 일곱 군데서 운영되고 있던 절이 모두 산문을 닫고 폐사에 이르렀다. 용궁사의 문도 굳게 닫혔다. 가섭은 그 이후로 어디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용궁사 건물은 불에 타 사라졌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섭불연좌석만 벌판 가운데 우뚝 서서 절이 있었던 곳임을 웅변하고 있었다. 왕실에서 가섭불연좌석은 그냥 두었다. 승려들과 불교를 공부하던 신도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신라의 불교는 반짝 번창하려다 막을 내렸다. 겉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불교의 씨앗은 완전히 꺼지지는 않았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3) 흥륜사 금당십성-혜공과 혜숙

혜공과 혜숙은 같이 신라 십성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일반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다. 특히 혜숙은 더 그렇다. 그렇지만 두 성인은 도력이 높아 일반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으나 불교적으로 큰 업적을 남겼다.신라시대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스님들이 출세할 수 있었던 시대로 읽혀진다.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는 인물들의 이력에는 화랑이나 당나라 유학 등의 이력을 흔히 볼 수 있다. 혜숙 스님은 화랑 출신으로 주변 인물들에게 몸으로 깨우침을 주었다.혜공 스님과 원효대사가 도력을 시험하는 이야기는 설화로 전해 내려오며 오어사라는 사찰 이름까지 남겼다. 기행을 일삼았던 신라십성 혜숙과 혜공 스님의 이야기를 더듬어본다.◆삼국유사: 혜숙과 혜공의 삶-혜숙 스님은 호세랑의 무리에 섞여 지냈다. 혜숙이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화랑의 명부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혜숙은 적선촌에 은거해 20여 년을 보냈다.때마침 국선인 구참공이 교외에 나가 사냥을 하게 되었다. 구참공이 가는 길가에 혜숙이 나와 말고삐를 잡으며 “저 또한 따라가고자 합니다. 괜찮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공이 허락했다.사냥하는 무리들은 이리저리 치달으며 옷소매를 걷고 서로 앞서거니 요란스러웠다. 공은 흐뭇했다. 잠시 쉬면서 여러 줄로 앉아 고기를 삶아 다투어 먹고 권하고 했다. 혜숙 또한 더불어 씹어 먹는데 꺼려하는 빛이 없었다. 그러다 구참공의 앞에 나아가 “이제 이보다 더 좋고 신선한 것이 있으니 바칠까요”라고 하니 “그래, 좋다”고 했다.혜숙은 사람들을 물리고 허벅지 살을 베어 쟁반에 올려 바쳤다.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공은 깜짝 놀라 “어찌 이다지 지독한 짓을 하는가”라고 물었다.“처음에 저는 공을 인자한 사람이며 만물과 통할 수 있는 분이라 여겨 따랐을 뿐입니다. 지금 살펴보니 공께서는 죽이는 데에만 온통 푹 빠져 있으시고, 남을 헤쳐 자신만 살찌우려 하니, 어찌 군자가 할 짓이겠습니까? 우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고 꼬집고는 옷을 털고 가버렸다.공은 대단히 부끄러워졌다. 혜숙이 먹던 쟁반을 보니 생고기가 그대로였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조정에 돌아와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찾아 들이도록 하였다. 혜숙은 부녀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었다. 사신이 더럽게 여기고 7~8리쯤 돌아오는 길에서 혜숙을 만났다.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다.“성 안 우리 신도 집의 칠일제에 갔다가 파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 신도 집에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얼마 있지 않아 혜숙이 갑자기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의 동쪽에 묻어주었다. 마을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현의 서쪽에서 오다가 도중에 혜숙을 만나 어디 가는가 물었더니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다른 지방에 가고자 하네.”서로 절을 하고 헤어졌다. 반리쯤 갔는데 구름을 타고 멀어졌다. 그 사람이 이현의 동쪽에 이르러, 장례를 치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있었던 일을 말했다. 무덤 안을 보니 오직 가죽신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절이 있는데 이름이 혜숙사이니 그가 거처했음을 말한다. 또한 부도가 있다.-혜공 스님은 천진공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의 이름은 우조였다.천진공이 일찍이 등창이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때 우조의 나이 일곱이었다. 우조는 어머니에게 공의 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라 말하고 공의 침실로 찾아가 저절로 병이 낫게 했다.우조가 커서 공의 매를 길렀는데 공의 뜻에 꼭 들어맞게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공은 우조가 성인임을 늦게야 깨달았다.“내가 지극한 성인이 우리 집에 맡겨진 것을 알지 못하고 헛말과 비례로 더럽히고 욕되게 하였구나. 그 죄를 어찌 씻겠는가? 이후로는 인도자가 되어 저를 이끌어 주소서.” 그리고는 내려와 절을 했다.신령스런 이적이 드러나면서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이라 했다. 혜공은 작은 절에 머무르며 미친 듯이 크게 취해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다. 그래서 부궤화상이라 불렀다. 거처한 절도 그런 까닭에 부개사라 했다. 이는 삼태기의 신라 말이다.또 절의 우물 가운데 들어가 몇 달 동안 나오지 않기도 했다. 나올 때면 언제나 푸른 옷을 입은 신동이 먼저 솟구쳐 나왔기 때문에 절의 승려들이 이를 보고 나오리라는 신호로 알았다. 그렇게 나왔는데도 옷이 젖지 않았다.늘그막에는 항사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때 원효가 여러 경소를 찬술하면서 스님에게 와서 의심나는 곳을 묻곤 했다. 간혹 서로 장난을 치기도 했는데 하루는 두 분이 시냇물을 따라가다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고는 돌 위에 똥을 누었다.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듯이 “자네는 똥인데 나는 물고기 그대로야”라고 외쳤다. 이로 인해 오어사(吾魚寺)라 이름 지었다.또 하루는 새끼줄을 꼬아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 그리고 남문의 회랑 둘레를 묶었다. 강사에게 이 새끼줄을 3일 뒤에 거두라고 일러두었다. 강사는 이상히 여기면서도 따라 했다. 드디어 3일이 지나 선덕여왕의 가마가 절 안으로 들어오자 지귀가 불을 질러 그 탑을 태우는데 오직 새끼줄로 묶어둔 곳만은 화를 면하였다.신령스런 자취가 자못 많았으며 마지막에는 공중에 떠서 입적을 알렸다. 사리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혜공과 원효의 도술 시합혜공은 부궤화상이라 별명이 붙을 정도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삼태기를 짊어지고 시장바닥이든 야산이든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다가 아무 곳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자유가 느껴졌다. 혜공은 이미 아무렇게 행동해도 자연의 이치에 거스르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또한 자연의 힘을 빌려 병을 치료하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기인의 이적을 일으키곤 했지만 누구도 그 행적을 알아채지 못했다.다만 고선사와 기림사에 머물며 대승불교론을 써내려가던 원효대사는 그의 행적과 높은 공부를 이해하고 가끔 선문답을 통해 세상의 이치와 불교의 진리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원효는 어디에도 묶이지 않는 혜공의 기행을 부러워하는 한편 백성들을 위한 깨우침에 적극 나서길 촉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혜공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라며 웃음으로 넘겨버렸다.원효가 혜공의 이러한 자유스러움에 장난을 부렸다. 혜공이 잠든 틈에 그의 삼태기에 죽은 쥐 여러 마리를 넣어두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냥 채소더미로 보였다. 일어난 혜공은 삼태기에 가득한 채소를 보더니 소여물을 삶는 농부의 솥에 그대로 쏟아 부었다. 쥐는 이미 채소로 변한 채 소여물이 되었다.다음 원효가 항사사로 옮겨가 있는 혜공을 찾아갔다. 이때 혜공이 “먼 길을 와서 배가 고플 텐데 물고기나 잡아먹자”고 권했다. 원효는 먼저 장날 쥐로 장난한데 대한 복수라 생각하고 흔쾌히 “좋다”고 응했다.둘은 어린아이들처럼 물가를 첨벙거리며 고기를 잡아 배부르게 구워먹었다. 그러고는 둘이 서로 마주보며 물가에서 변을 보았다. 배설되는 것들은 모두 고기가 되어 상류로 힘차게 헤엄쳐갔다. 그중 하나가 오색찬란한 빛을 자랑하며 춤추듯 두 사람을 선회하다가 또한 상류로 유유히 사라져갔다.이를 보고 둘은 서로 “저 녀석은 내 고기”라고 우기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여시오어(如是吾魚)’라는 말이다. 이 말로인해 혜공이 머물던 항사사의 이름이 오어사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기행단 삼화령미륵불의 비밀 찾아 남산 기행

삼국유사기행단이 장맛비가 내린 가운데 경주 남산에서 삼화령미륵불 출토 현장과 남산신성 흔적을 찾아 답사기행을 진행했다.삼국유사 이야기 현장을 찾아가는 기행단 30여 명은 지난 25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성덕대왕신종과 중사 미륵불과 십일면관음상을 찾아보고 경주 남산과 낭산을 둘러보는 답사를 이어갔다.이날 답사는 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의 해설로 진행됐다. 기행에는 박차양 경북도의회 의원, 한순희 전 경주시의회 문화행정위원장, 이상애 전 경주시 공보관, 손은조 시인 등의 문화인과 부산, 울산, 포항 등에서도 함께 참여해 역사문화에 대한 열기를 보였다.기행에서 경주박물관 옥외전시실의 성덕대왕신종은 경덕왕이 성덕왕의 덕을 기리기 위해 구리 12만근으로 주조하기 시작해 혜공왕 7년 771년에 완성해 봉덕사에 안치했다는 내용과 영묘사, 봉황대, 경주문화원, 박물관 등으로 이동경로까지 분석했다. 김구석 소장은 성덕대왕신종의 특징과 한국종과 외국종의 비교까지 상세하게 해설했다.경주 남산에서는 화백제도가 밝혀진 경위를 설명하고, 진덕여왕 당시 우지암에서 신라 대신들이 회의를 진행하면서 호랑이가 나타난 이야기와 김유신의 위상에 대한 당시 시대적 분위기 등도 구수하게 풀었다.경주남산연구소 김구석 소장은 “남산신성은 문무왕이 축성한 것으로 기록된 문헌들을 토대로 살펴보면 현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며 “특히 대규모로 지어진 창고는 나라의 무기와 곡식을 저장했던 창고가 아니라 문무왕의 개인적인 창고”라고 이색적인 해설을 내놓아 주목을 끌었다.또 최근 발견된 경주 남산의 토성과 남산신성의 축성 흔적, 남산신성의 북문지 등을 돌아보며 “남산신성의 둘레는 약 4.6㎞의 거리로 기록과 남아 있는 흔적이 일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네 자매가 함께 참석한 이상애 가족은 “역사문화를 통해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배우고, 또 다른 문화콘텐츠를 육성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꾸준히 기행에 참석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고향 대구 기행 참가해보세요

대구시와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는 역외 출향청년의 대구 귀환을 돕기 위해 지역정보와 취·창업지원 정보를 담은 뉴스레터 발송하고 페이스북 등 정보전달 채널을 오픈했다고 22일 밝혔다.취업에 관심 있는 출향청년을 모집해 2~5일 간 대구기행을 통해 지역을 재발견하고 귀환의향을 높일 수 있도록 ‘자유도시 대구, 대프리구 취업편’ 참가자를 내달 4일까지 모집한다.‘자유도시대구 대프리구 취업편’은 대구소재 이전 공공기관 및 미래산업 탐방, 대구 취업 생태계 토크콘서트 등 취업연계 프로그램과 대구 도심을 탐방하고 청년문화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다.대상은 대구·경북 지역 외 만 19~39세 이하 청년이다. 청년귀환프로젝트 SNS 플랫폼 ‘욜로(YOLO)온나’ 내 구글폼을 통해 온라인으로 신청받는다. 출향청년의 대구기행을 도울 지역청년은 ‘청년서포터즈’로 31일까지 신청하면 된다.지난 5월 문을 연 청년 귀환 SNS 플랫폼 ‘욜로(YOLO)온나’는 청년들에게 대구의 새로운 정보 및 청년정책 등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온라인 채널로서 매주 화요일 청년정책, 채용공고, 대외활동 등 유용한 정보를 ‘슬기로운 YOLO 생활’ 뉴스레터에 담아 제공하고 있다.지역의 10여 개 관련 기관이 ‘유턴청년 지원기관 협의체’를 구성해 청년유턴지원정보를 제공하고 9월부터는 챗봇 서비스도 제공할 계획이다.대구시 김요한 청년정책과장은 “청년귀환 프로젝트를 통해 출향청년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대구의 변화된 모습을 재발견해 대구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2) 흥륜사 금당십성-자장과 표훈

자장은 신분이 상당히 높은 신라 진골 대신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황제로부터도 인정을 받는 덕망이 높은 승려였다.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그를 돌려줄 것을 요청해 돌아오게 할 정도로 자장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었다.당나라에서 돌아온 자장은 분황사에 머물며 대국통이 되어 왕실에서 법회를 주관하기도 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축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목탑이 준공되고 황룡사 제2대 주지로 주석했다.반면 대덕 표훈은 삼국유사에서 천제를 만나 왕의 뜻을 전하는 등으로 천궁에까지 드나드는 술법을 펼치는 도력이 높은 승려로 전해진다. 표훈은 의상대사의 십대제자 중 하나로 불국사에 머물면서 아들이 없던 경덕왕의 심부름으로 천제를 만나 부탁해 혜공왕을 낳게 했다.자장과 표훈은 신라시대 불교진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신라 십성으로 선정됐다. 같은 금당십성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자장이 널리 알려진데 반해 표훈은 삼국유사에 잠깐 등장하는 이외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전해지는 신라십성 자장과 표훈의 단면을 살펴본다.◆삼국유사: 자장이 계율을 정하다대덕 자장은 김씨이고, 본디 진한의 진골 무림 소판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가 높은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뒤를 이을 자식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에 삼보에 마음을 기울여 천부관음에게 나아가 자식 하나 낳기를 바라며 축원했다.“만약 사내아이를 낳으면 불교의 바다에 나루터와 다리가 되도록 키우겠나이다.”문득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가슴 속으로 들어오더니 아이를 가져서 석가모니와 같은 날 태어났다. 이름을 선종랑이라 했다. 정신은 맑고 뜻이 슬기로웠으며 글은 빛나고 생각이 높아 세상의 맛에 물들지 않았다.일찍 부모를 여의고는 더욱 세상의 번잡한 것이 싫어졌다. 처자식을 버리고 밭과 동산을 내놓아 원녕사를 만들었다. 홀로 그윽하고 험한 곳에서 지내며 호랑이와 승냥이도 피하지 않고 고골관을 닦았다. 조금이라도 권태로움이 닥치면 곧 작은 방을 지어 둘레에는 가시나무 담을 두른 채 그 안에 벌거벗고 앉아 있었다. 움직이면 곧 가시바늘이 찔러댄다. 머리는 기둥에 달아두고 명상이 흐려지는 것을 물리쳤다.마침 재상 자리가 비자 귀족 집안 간에 의견이 맞아 여러 차례 자장을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오지 않으면 참형을 내리겠다”는 칙명을 내렸다.자장이 이를 듣고 “내가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계를 깨고 백년을 사는 일은 바라지 않노라”고 했다.사정을 들은 왕이 출가를 허락했다. 이에 바위 수풀 속으로 깊이 숨어서 먹는 것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였다. 그때 이상한 새가 과자를 물고 와 공양하니 손으로 받아먹었다. 아련히 꿈속에 하늘의 사람이 내려와 오계를 주자 그제야 비로소 골짜기를 나왔다. 동네의 남녀들이 다투어 와서 계를 받았다.자장은 변방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며 서쪽으로 가 큰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평 3년 병신년(636)에 칙명을 받아 제자 승실 등 열 명 남짓 데리고 서쪽 당나라 청량산으로 들어가 보았다.산에는 만수대성의 소상이 있었다. 그 나라에서 이 상에 대해 “하늘님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 만든 것이다”라고 전해 내려온다. 자장은 이 불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다. 꿈에 불상이 이마를 만지더니 산스크리트어로 된 계를 주었다. 하지만 깨어나서도 해석하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특이하게 생긴 어떤 스님이 오더니 해석해 주었다.또 “비록 수만 가지 가르침을 배운다 한들 이 글을 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자장은 이미 성스러운 가르침을 입었음을 알고, 북대를 내려와 태화지를 거쳐 당나라 서울로 들어갔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승광별원에서 편히 지내게 해 주었다. 은총을 내림이 빈번하고 두터웠다. 그러나 자장은 그 번잡스러움을 싫어해 황제에게 글을 올리고 종남산 운제사의 동쪽 낭떠러지에 들어가 바위를 잇대 방을 지었다. 3년을 지내는 동안 사람과 신이 계를 받고 신령스런 응답이 날마다 번갈아 나타났다. 글이 너무 길어져 싣지 않는다.다시 서울에 들어오자 황제가 사람을 보내 위로했다. 비단 20필을 내리고 옷감으로 쓰도록 했다.정관 17년 계묘년 (643)이었다. 본국의 선덕왕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해달라고 했다. 황제는 허락해 주면서 궁궐로 불러들여 가사 한 벌과 좋은 비단 500단을 내려 주었다. 세자도 200단을 내렸으며 여러 가지 예물을 갖추어 주었다. 자장은 자기 나라에 경전과 불상이 충분치 못하다 하여 대장경 1부와 여러 번당에서 화개까지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해 모두 실었다.본국에 이르니 온 나라가 크게 환영했다. 왕은 분황사에 머물게 하고, 쓸 것과 시중들 사람을 충분히 내려주었다. 한번은 여름에 궁중으로 불러 들여 대승론을 강독했으며 황룡사에서 보살계본을 일곱날 일곱 밤을 강연했다. 하늘에서는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어둑어둑 깔려 강당을 덮었다. 남녀 승려와 신도 모두 그 신이스러움에 깊이 감탄했다.조정에서 “불교가 동쪽으로 온 지 오래되었지만 부처님의 일을 맡아 받들고 수행하는 규칙이 없는 채 지내고 있다. 잘 짜여진 규정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잘 정돈할 수가 없다”고 의논했다. 의논에 따라 자장을 대국통으로 삼는 칙령이 내렸다. 무릇 승려들을 하나로 이끌어 가도록 모든 권한을 승통에게 주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자장과 당 태종의 약속자장은 신라 소판 무림공의 아들로 590년에 태어났다. 당시는 진평왕 12년으로 진흥왕의 정복전쟁 후유증에 의한 외세침략이 끊이지 않던 때였다.자장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처자식마저 등진 채 깊은 산으로 들어가 처절한 수신의 길을 걸었다. 골방에서 알몸으로 가시덤불 속에 앉아 머리는 천정에 매달아 졸음을 좇아가며 불도 삼매경에 들었다.왕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려 불렀지만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않았다.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 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며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에게 승려의 길을 갈 것을 허락했다.선덕여왕이 즉위하고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 청량산에서 기도하며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사구계를 받았다. 이에 당나라 태종의 신임과 예우를 받으며 장안에서 수도했다.당 태종 이세민은 반역 호족들을 진압하는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자 아버지인 당 고조로부터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천책상장의 별호를 얻을 정도로 호걸이었다.이러한 태종이 나라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복전쟁을 이어나가자 자장은 그의 신임을 바탕으로 신라와의 전쟁 불가론을 펼쳐 불가침의 약속을 얻어냈다. 태종이 고구려 정복의 꿈을 펼치며 승승장구 할 때의 일이라 대단한 성과로 평가된다.자장은 당시 볼모로 당나라에 와있던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과 머리를 맞대어 신라를 지키기 위한 전략을 추진했다. 김인문은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에게 신라가 고구려를 칠 수 있는 병력을 지원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자장은 태종에게 신라와의 협력을 다짐하는 약속을 얻어냈다.자장은 태종의 야욕을 간파해 고구려와 맞대면하고 있던 거란을 꾀어 고구려와 전쟁하도록 종용하고, 약해진 거란과 고구려를 한꺼번에 침략하는 전략을 제시해 더욱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자장은 신라와의 동맹을 제의해 태종의 선심을 얻는데 성공했다.그러나 태종의 야욕에 찬 속마음을 헤아린 자장은 신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황룡사 9층 목탑 건축을 건의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데 집중했다.이때 자장은 대국통이 되어 신라에 화엄사상을 소개하며 승려들의 질서를 세우는데도 크게 공헌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 건축자원 스토리 담긴 대구 건축문화기행 상품 개발

대구시와 대구관광뷰로는 대구의 천년 역사를 품은 3대 문화(신라·가야·유교) 건축자원을 활용한 관광콘텐츠를 개발하고 코로나19로 지친 관광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16일 대구시에 따르면 관광콘텐츠는 3대 문화권을 아우르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대구의 건축물들을 여유롭게 즐긴다는 의미로 ‘천년 대구를 거닐다’로 이름 붙였다. 대구 내 산재한 3대 문화의 건축 자원과 자원에 담긴 스토리를 결합해 몰입도를 높인 스토리텔링형 건축기행이다.핵심코스 3개, 보조코스 9개로 구성돼 있으며 단순한 건축물 관람이 아닌 관광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코스로 구성했다. 대구시는 3대 문화권 코스개발과 함께 건축문화기행의 3가지 테마에 맞는 12개의 코스 소개하는 대구여행 정보가 함께 수록된 ‘천년대구를 거닐다’ 안내용 가이드북을 제작했다. ‘천년 대구를 거닐다’ 상품 운영 시 활용될 전담 해설사 양성 교육을 진행한다.건축학회나 건축학과 학생 등 고건축에 관심이 있는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팸투어를 실시하는 등 하반기 시범투어를 거쳐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품을 운영할 예정이다. 대구시 박희준 문화체육관광국장은 “코로나19로 지친 관광객들이 대구의 건축문화기행과 함께 천년 대구를 거닐며 잠시 잊었던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껴 보길 바란다”고 말했다.이주형 기자 leejh@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1) 흥륜사 금당십성-원효와 사파

원효는 신라 금당십성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신라 불교 대중화를 이룩한 시대를 초월한 성인으로 이미 유명한 인물이다. 원효는 삼국유사에서도 여러 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 곳곳에 등장한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과정,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설총을 낳은 이야기, 기림사 설립과 혈사에서의 죽음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도술을 부리는 수준의 깨달음을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한다. 오어사의 이름이 지어진 배경이 된 혜공과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도 등장한다.반면 사파 또는 사복 등으로 불리는 인물은 신라십성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유사 4편 의해 ‘사복이 말하지 않다’에서 원효와 함께 잠깐 언급되는 외에는 기록이 없다.이번 호에서는 원효와 사파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원효에 대한 이야기는 제4편을 소개하는 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삼국유사: 사복이 말하지 않다서울(경주) 만선북리에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잉태해 낳았다.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때문에 사동 또는 사복 또는 사파라고 불렀다.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맞으면서 예를 갖추었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그대와 내가 예전에 암소에 불경을 실었는데 지금 죽어버렸으니 함께 가서 장사를 치르자”고 했다.원효가 “좋소”라 대답하고 함께 사복의 집에 이르렀다. 원효가 시체 앞에 나아가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고 하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했다. 원효가 다시 “죽고 나는 것이 고통이다”고 했다.둘이서 시신을 메고 활리산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원효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소”라고 했다.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역시도 그와 같은 이가 있으니 연호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오”라 답했다.사복이 말을 마치고 풀을 뽑으니 아래에 세계가 생겨났다. 휘황찬란하고 깨끗하면서도 칠보로 장식한 난간과 누각이 장엄해 분명히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들어가니 그 땅이 갑자기 합쳐졌다. 원효는 이에 돌아왔다.후세 사람들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도량사라고 했다. 매년 3월14일에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항규료 삼았다. 사복의 교화는 오로지 이것을 보여 준 것뿐인데 세간에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돈다.찬한다. “깊이 잠든 용을 어찌 등한시하리/ 떠날 때 읊은 한 곡 간단도 하다/ 고통스런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에 떠도는 세계가 넓기도 하다.”◆신라십성 원효와 사파-원효는 7세기에 활약한 승려로 출가 이후 환속해 무애행을 통한 정토신앙 확산에 힘쓴 인물이다. 속성은 설씨이고, 어렸을 때는 서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있다.파계하고 환속한 뒤에는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이라는 뜻으로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지었다.원효는 15세에 출가,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세웠다. 낭지와 혜공, 보덕 등의 선승들에게서 불법을 배우며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고행을 했다.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크게 기여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 시호를 내려 지금도 분황사 터에 대성화쟁국사비를 건립했던 대좌가 남아 있다.문무왕 시대 661년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의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박으로 무애를 만들어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누구나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다.고선사에 머물며 참선을 하기도 했다. 기림사를 창건해 머물다 혈사에서 686년 신문왕 6년 70세 일기로 입적했다. 아들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발생과 소멸,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다.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사파: 신라 왕경의 흥륜사 금당에 소상으로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하나다. 사복으로도 불렸다. 사복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원효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7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월일기에 사복은 원효의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진영이 원효와 진표의 진영과 함께 소래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유명 승려로 분석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가 전생에서 사파를 만나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전국을 떠돌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걸인의 행색으로 동냥을 얻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거들며 끼니를 얻어먹는 일꾼의 일도 줄곧 했다.설악산 큰 절에서 땔나무를 베어오고, 부엌의 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일을 하기도 했다. 원효가 강원도 어느 절에서 불목하니로 있을 때였다. 강원도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절에서는 민가와 마찬가지로 겨울에 땔 나무를 늦가을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아두어야 한다.그런데 그 절에 미리 불목하니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던 황소고집으로 소문 난 사복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사복은 어릴 때부터 왼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불구였지만 힘이 장사이고 고집이 남달라 자신의 일을 거들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에는 간섭을 하려하지 않았다.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물을 길어올 때면 물동이의 절반이 출렁거리며 넘쳐 다른 사람들이 다섯 번 길어오면 될 일을 사복은 열 번은 왕복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사복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없이 혼자 해내었다.원효가 불목하니로 들어왔을 때, 사복은 심하게 그를 구박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불손한 언행으로 원효를 부려먹었다. 그가 불문율처럼 행하던 물 긷는 작업과 땔 나무 베는 일도 대부분 원효에게 시켰다. 원효는 말없이 사복이 시키는 일을 해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면서 늦도록 불법의 이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고집쟁이 장애인 불목하니로 관심 밖에 있던 사복은 의외로 불법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가끔 공양시간에 만나는 주지스님도 당황해 했지만 사복의 불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차츰 원효와 죽이 맞은 사복은 겨울철 땔 나무를 준비하는 작업에도 원효와 함께 하길 즐겨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사복은 여느 때처럼 원효를 불러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산에서는 장작을 마련할 마땅한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땔 나무를 실어 날랐지만 이골이 난 사복과 원효는 매일 수레 가득 나무를 실어왔다.늦가을 어느 날 때 이른 눈이 내린 길에 수레가 계곡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사복과 원효가 매달렸지만 속수무책으로 열길 낭떠러지로 함께 떨어져버렸다. 원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사복의 배를 뚫고 나온 썩은 대나무 줄기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구나. 다음 생에 또 만나세”라는 말을 남기며 사복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원효는 사복의 미소 띤 죽음에서 또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0) 흥륜사 금당십성-염촉과 의상

신라 역사는 불교의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교가 성했다. 신라는 불국토였다는 말 또한 역사기록 곳곳에 나타난다. 불교의 나라를 상징하듯 신라시대 고승들의 활약이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라 고승들 중에서도 흥륜사 금당벽화에 그려진 10명의 신라 유명 승려를 신라십성이라 부른다.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염촉 이차돈, 도력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혜숙·안함, 중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의상 등은 동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경덕왕 때에 천계를 왕래했던 표훈, 뱀처럼 기어 다녔다는 사파, 대중 불교의 효시를 이룬 원효, 삼태기를 지고 술과 춤을 좋아해 부궤화상으로 불렸던 혜공, 당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신라의 재상 무림공의 아들 자장 등은 서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이번 호에서는 염촉 이차돈과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신라의 고승: 염촉과 의상-염촉은 불교의 황무지였던 신라에 목숨을 던져 불교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이차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신라에서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인 527년에 신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법흥왕은 그의 마음을 가상히 여겼다. 왕은 이차돈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는 말을 받아들였다.왕의 명령을 받고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자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 이차돈은 순교의 흰 꽃이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경주의 북쪽 산에 떨어져 거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순교의 거룩함을 기리는 일이 쌓여갈수록 신라의 불교는 꽃을 피웠고, 꽃 피는 불교에 따라 신라 또한 큰 나라로 발전해 갔다.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도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차돈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라는 설명이다.-의상의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의상의 한자 표기가 義湘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이나 義想으로 기록돼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덕여왕 때 644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650년 원효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당시 고구려 땅)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선사에게서 화엄사상을 배웠다. 668년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했다.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됐고, 신라 하대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로 이름이 높다.의상의 제자인 표훈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고려 숙종이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나라 때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경남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화엄사상에 기초해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했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의 여인의상은 왕족이었다. 관리의 아들로 건장한 체격과 부티 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의상은 재주 또한 뛰어나 딸을 가진 귀족들로부터도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의상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근원과 같은 삶의 화두를 해소하는 철학적 고민에 깊이 빠져 19세에 불가에 귀의했다.의상은 불교의 진리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 처음 원효와 유학의 길에 나섰다가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인돼 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당나라 사신이 귀국할 때 그를 길잡이 삼아 유학의 길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은 신라의 많은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한을 남겼다. 남몰래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는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동경했던 여인들은 요즘 아이돌을 바라보는 10대 열혈 팬과 같았다. 그렇지만 의상은 훌훌 털고 당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에 따라 나선 열혈 팬이 있었다. 대신의 딸 선묘 낭자는 오매불망 사랑하던 의상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남장을 하고, 의상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리 타국에서 공부하게 될 의상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의상이 당나라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선묘는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안에 들어선 날 선묘는 드디어 의상 앞에 나섰다. 아무도 인기척이 없는 시간을 틈타 선묘는 “서라벌에서 따라나선 선묘라 합니다. 서방님께서는 아무런 염려하지 마시고 공부에 전념하십시오. 제가 뒷수발을 들겠습니다”라며 그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의상은 너무나 간절한 선묘의 청과 정성에 차마 떨치지 못하고 반승낙을 하고 말았다. 선묘는 그날부터 인정받은 의상의 그림자가 되어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의복은 물론 신발까지 흙 하나 묻어있지 않도록 살폈다. 의상이 공부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그림자처럼 붙어 수발을 드는 바람에 의상조차도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게 공부에 전념하게 됐다.의상은 드디어 당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당나라 최고의 승려로 인정받던 지엄의 수제자가 됐다.의상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신라로 귀국했다. 선묘가 의상의 보양을 위해 소림사로 약재를 구하러 간 사이에 신라 조정에서 보낸 배는 의상을 태우고 돛을 올리고 신라로 출항했다.천만리 이국땅에 버려진 선묘는 멀어지는 의상의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묘의 정성을 진작 알고 있던 동해용왕은 선묘에게 신비한 힘을 불어넣어 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용왕의 힘을 얻은 선묘는 의상의 수호신이 되어 부석사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 터를 마련하고, 그가 입적할 때까지 돌보는 바위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8) 백률사

삼국유사 전체 총론적인 성격을 가진 기이편에서 신라의 흥망성쇠를 더듬어 보고, 각론이자 본론이라 설명하는 흥법편에서 불교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본격적인 불교사를 통해 전해지는 불국토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탑상편을 소개한다.탑상편은 황룡사, 영묘사, 흥륜사, 백률사, 천룡사, 무장사, 민장사, 생의사 등의 유명 사찰과 종, 탑 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삼국유사 탑상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가섭불연좌석에 이어 황룡사 장육, 황룡사 9층탑, 황룡사종과 분황사종, 흥륜사 금당십성 등의 내용이 나타나지만 기행 순서에 따라 백률사편을 먼저 소개한다.◆삼국유사: 백률사계림의 북쪽 산은 금강령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 대비상이 서 있는데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신령스런 이적이 자못 많았다. 어떤 이는 중국의 뛰어난 기술자가 중생사의 불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백률사 앞의 바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두고 사람들은 “이것은 대성이 일찍이 하늘의 도리천에서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돌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다. 이제까지 문드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례랑을 구출해 돌아올 때 나타난 자취”라고도 말한다.천수 3년은 임진년(692)인데 9월7일에 효소왕이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다. 1천여 명의 무리가 따랐는데 안상과 특히 가까이 지냈다. 천수 4년 계사년 늦봄에 무리를 이끌고 금란에 놀러 가다 북명 경계에 이르렀는데 말갈족에게 잡혀가니 무리가 모두 하릴없이 돌아왔으나 안상만 뒤쫓아갔다. 이때가 3월11일이다.왕이 이를 듣고 놀라 “아버님께서 신령스런 피리를 받아 내게 전해 주셨다.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안 창고에 간직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국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단 말이냐, 이럴 어떻게 할꼬”라고 말했다.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뒤덮었다. 왕이 또 깜짝 놀라 창고 안을 살펴보라 했더니 가야금과 피리 두 보배가 없어졌다. “내 어찌 이다지 챙기지 못하여 국선을 잃더니 또 가야금과 피리를 잃어버렸단 말이냐”며 한탄했다.이에 창고지기 김정고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 4월에 전국적으로 “가야금과 피리를 찾는 자에게 상으로 1년치 세금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5월15일, 낭의 두 부모가 백률사의 대비상 앞에 가서 정성들여 여러 날을 기도했다. 그러자 홀연히 상 위에 가야금과 피리가 나타나고, 낭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두 부모가 엎어질 듯이 기뻐하며 오게 된 경로를 물었다.“제가 잡혀가 적국에서 목장 일을 하는데 갑작스레 단정한 스님이 손에 가야금과 피리를 들고 나타나 나를 따라오느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안상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이 피리가 둘로 나눠져 두 사람이 각각 하나씩을 타고, 스님은 가야금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서 돌아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고 했다.이런 경위를 들은 왕은 크게 놀라며 낭을 맞아들이고, 가야금과 피리를 안으로 들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각각 무게가 50냥 되는 다섯 가지 그릇 두 벌, 마납가사 다섯 벌, 굵은 명주 3천 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했다.나라 안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관련된 사람에게 직위를 3급씩 높여주고, 백성들에게 세금 1년치를 면제해 주었다. 절의 주지승은 봉성사로 옮기고, 낭은 대각간에 임명했다.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 스님은 대통으로 삼고, 창고지기 다섯 사람은 풀어주면서 각각 5급의 벼슬을 내려주었다.6월12일 혜성이 나타나 동쪽 방면이 어두워지고, 17일에는 또 서쪽 방면이 어두워졌다. 일관이 “가야금과 피리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그러자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 영험스런 이적이 많으나 글이 길어져 싣지 않는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과 고구려 출신 장군의 충돌효소왕 때 화랑의 국선이 되었던 부례랑은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부례랑은 국선이 된 이후 1천여 명의 낭도들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며 낭도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한편 전술훈련 등으로 호연지기를 키웠다.부례랑 일행은 강원도 강릉을 지나 설악산에 이르러 산수를 즐기며 전술훈련을 하기로 했다. 설악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계곡이 깊어 전쟁에 대한 훈련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그러나 당시 설악산 일대에는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며 1만여 명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설악산 일원에서는 신라의 조정보다 대막호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치고 있었다.대막호리는 장군의 후손답게 덩치가 우람하면서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덕이 있어 주민들이 모두 잘 따랐다. 그는 일대 목장과 농업,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자신의 휘하에 두고, 2천여 명의 청년을 군사훈련 시키며 사병으로 키워 외부침입에 대한 방어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 부례랑 일당이 전술훈련을 하면서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대막호리 영역의 가축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일부에서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대막호리는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크게 분노해 국선 부례랑과 안산 등의 우두머리 20여 명을 체포해 가두어버렸다.당황한 부례랑이 “우리는 신라의 화랑도들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역을 익히고 전술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으나 대막호리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풀어주지 않았다.대막호리는 “너희들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준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말을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해 세금을 바친 것으로 배부르게 먹고살면서 고마움은 모르고 오히려 핍박하다니 가당찮다”고 꾸짖으며 화를 냈다.부례랑은 대막호리의 단호함에 전령을 불러 궁중으로 급파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를 설득할 수 있는 군사나 강력한 힘을 가진 장수가 필요하다”고 짧게 사연을 적었다.효소왕은 국선 부례랑이 국내에서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통일 이후 신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군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에 이어 효소왕 대까지는 당나라와도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교류하며 감히 신라를 넘보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국선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그때 백률사의 주지 스님은 고구려 출신 혜통 국사의 배움을 이어받은 정혜스님이었다. 정혜스님은 국내는 물론 국제 정세에 밝을 뿐 아니라 특히 고구려 신민들의 세계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백률사는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에 이은 국가적인 사찰로 왕실에서도 잦은 법회를 주관하는 신라의 주요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효소왕 또한 백률사 주지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부례랑의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정혜스님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왕의 밀지를 받아든 정혜스님은 무승 셋을 대동해 빠르게 설악산으로 이동했다. 화랑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칫 갈등관계가 깊어질 뻔했던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정혜스님의 주선으로 깨끗하게 오해를 풀고 친하게 되었다.“신라에는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이고, 튼튼하고 건강한 나라를 위한 훈련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는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는 스님의 말에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경계를 풀고 호탕한 건배를 나누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해 나라를 위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기로 다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7)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

백제 29대 법왕은 28대 혜왕과 같이 즉위 기간이 1년 남짓으로 짧아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당시 삼국시대는 각국이 상대국가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첩자를 많이 활용했다. 잘못된 정보를 얻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방면으로 여러 첩자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서로 잘 알고 있었다.가장 힘이 약했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는 강한 나라로 자리를 굳혀가자 고구려와 백제는 앞다투어 이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기에 이르렀다.백제 법왕은 신라가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통한 불교를 장려하고, 화랑제도를 통한 교육을 강화해 국력을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해 불교 장려정책을 쓰기로 했다.그러나 법왕의 노력은 짧은 재위기간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30대 무왕이 그의 정책을 이어받아 강한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됐다. 무왕은 법왕의 불교장려 정책에 따라 왕흥사를 대대적인 국찰로 완공했다. 이어 불법을 장려해 나라의 힘을 키워 신라와의 전쟁에 나섰다.◆삼국유사: 법왕이 살생을 금하다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이고, 효순이라고도 했다. 개황 10년 기미년(599)에 왕위에 올랐다. 이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질 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다음해 경신년에는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내리고, 그때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도 한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짐승들에게도 베푼 너그러움은 온 산에 도탑고/ 돼지며 물고기도 흡족한 혜택에 사해가 인자롭다/ 갑작스레 별세했다 섭섭히 말하지 말라/ 상계 도솔천은 바야흐로 꽃다운 봄이리니.◆백제 법왕과 무왕-법왕은 백제 제29대 왕으로 신라 진평왕 시대인 599년부터 600년까지 1년 남짓 왕위에 있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 여선(餘宣) 등으로 전한다. 제28대 혜왕의 맏아들, 또는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는 기록이다.법왕은 혜왕과 같이 재위 기간이 짧아 전해지는 기록은 많지 않다. 시호에서도 나타나듯이 불교를 숭상해 왕위에 오른 599년 12월에 살생을 금지하고 민가에서 사냥용으로 기르는 매와 새매를 모두 놓아주고 고기 잡고 사냥하는 도구를 모두 태워버리라고 명령했다.그리고 이듬해에는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승려 30인을 출가시켰으며, 가뭄이 들자 칠악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삼국사기에는 왕흥사가 600년에 창건하기 시작해 무왕 때인 634년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돼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무왕 때에 지명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못을 흙으로 덮어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007년 충남 부여의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청동 사리함에는 “정유년(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사찰을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왕흥사가 법왕 이전인 위덕왕 때에 이미 창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무왕은 백제 제30대 왕으로 법왕에 이어 600년에 왕위에 올라 641년까지 집권했다. 성은 부여(夫餘), 이름은 장(璋)으로 수나라 기록에는 여장(餘璋)이라고 적혀 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대부분 사서에는 29대 법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뜻과 기상이 호방하고 걸출했으며,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그래서 신라와는 계속해서 갈등 관계에 있었다.무왕은 특히 623년 이후에는 거의 매년 신라와 전투를 벌였다. 627년에는 무왕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웅진에 머무르며 신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단행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대규모 정벌은 실현되지 못했다.무왕은 고구려와도 갈등 관계에 있었다.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통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다. 611년에는 수나라와 사신을 주고받으며 고구려 침공에 대해 의논했다.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뒤로는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며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왜(倭)와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관륵을 보내 천문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기도 했다.무왕은 재위 기간에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여러 성을 쌓으며 국방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왕권 강화를 나타내기 위해 궁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기도 했는데 630년에 사비의 궁궐을 중수했다.또 무왕은 삼국유사에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용의 아들로 탄생해 진평왕의 선화공주와 결혼해 왕위에 오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고대부터 전승된 설화에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무왕은 재위 42년째인 641년 3월에 죽고, 그의 맏아들인 의자왕이 왕위를 계승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왕과 무왕의 신라 베끼기백제 법왕은 급성장한 신라의 국력에 당황하면서도 황당해하는 한편 그 힘의 바탕에 의문을 가졌다. 백제는 다소 우월적 위치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입장에서 공격을 받아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은 이후 반성의 시간을 가진데 이어 만회의 기회를 노렸다.백제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신라의 성장배경과 힘의 원동력, 허점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했다. 결국 신라가 성장한 배경에는 불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탄탄한 정신적 결집을 찾아냈다. 또 화랑제도를 통한 인재양성의 교육철학이 끊임없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따라잡기에 나섰다.법왕은 먼저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뭉치는 정신적 합일점을 찾아가는 길을 불교적 심리전파라고 결론짓고, 불교중흥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법왕은 국민들을 정신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절을 짓기로 하고, 나라의 중심에 거대한 사찰 왕흥사 건설에 나섰다. 왕은 곧 나라이다는 생각에 절을 왕궁처럼 거대하게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하면서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으려 했다.또 전국에 불교적 이념을 퍼뜨리기 위해 가장 먼저 사냥을 금지하며 살생을 못하게 했다. 백성들이 마음속에서부터 나라를 걱정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게 상징적으로 엄격하게 불교적 이념을 전파했다. 지명법사와 같은 유명 고승을 초빙하고, 승려들의 공부를 지원했다.법왕의 이러한 판단은 신라가 흥륜사 건축에 이어 왕궁에 버금가는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영흥사 등의 대규모 사찰을 나라의 중심부에 줄줄이 세워 운영하는데 영향을 받았다.법왕의 불교 진흥정책은 다음 무왕에 그대로 전해졌다. 무왕은 신라의 중심부까지 숨어들어 정책은 물론 지리적인 특성까지 속속들이 몸으로 부딪치며 파악하고 있었다.무왕은 결국 왕흥사를 완공하고, 온 국민이 하나로 기원하며 마음을 모을 수 있게 동서 쌍탑을 건립했다. 왕흥사는 국민적 염원을 들어주는 미륵불을 안치하면서 미륵사로 이름을 바꾸어 백제를 대표하는 사찰로 천 년이 지나도록 이름이 전해지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6) 법흥왕의 불교

법흥왕은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위해 율령을 제정, 공포하는 등의 다양한 업적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를 공인해 나라의 국정이념으로 삼고 흥륜사를 건설하면서 금관가야를 합병하고,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법흥왕은 키가 7자나 되는 거인으로 마음도 후덕해 금관가야를 합병하고도 왕족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융화정책을 펼쳤다.그러나 기존 귀족들을 중심으로 두텁게 깔렸던 민간 신앙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정신적인 문제는 왕실 중심으로 진행하는 불교정책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법흥왕은 왕위를 물려주면서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주지가 되어 백성들을 위한 공덕을 쌓는 법회를 주관하다 절에서 생을 마감했다.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도 왕권의 강화를 위해 황룡사를 지어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정복군주로 나서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진흥왕도 말년에는 거칠부 등 귀족들의 힘에 밀려 전대 법흥왕의 뒤를 이어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삼국유사: 탑탑안항 사사성장진흥대왕이 즉위한 지 5년인 갑자년(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 547년에 양나라 사신 심호가 사리를 가지고 왔으며, 565년에 진나라 사신 유사가 승 명관과 함께 내경을 받들고 왔다. 이제는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서 있었다. 절의 깃발을 세우고 범봉을 걸며, 불상과 승려들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는 밭이 되고, 대승과 소승의 법문이 나라 안에 자애로운 구름으로 덮였다.불국토로부터 보살이 세상에 나오고, 서역의 이름난 승려들이 이 땅에 내려오니, 이런 까닭에 세 민족을 통일해 나라를 만들고 사해를 껴안아 한 집을 이루었다. 그래서 덕 있는 이름은 천구의 나무에 쓰고, 신령스런 자취는 은하수에 비추었으니, 어찌 세 분 성인(아도, 법흥왕, 이차돈)의 위엄으로 이룬 것이 아니겠는가.그 뒤에 국통 혜륭, 법주 효원, 김상랑, 대통 녹풍, 대서성 진노, 파진찬 김억 등이 옛 무덤을 다시 쌓고, 큰 비석을 세웠다.때는 원화 12년 정유년(817) 8월5일이다. 이때는 제41대 헌덕대왕 9년이다. 흥륜사의 영수선사가 그 무덤에 예불하는 신도들을 모아 결사를 만들고, 매달 5일마다 그 영혼의 아름다운 소원을 위해 단을 마련하고 법회를 베풀었다.또 향전에서는 시골 노인들이 그의 기일을 맞을 때마다 흥륜사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는데 5일이 바로 사인이 목숨을 버리고 불법을 따르던 날이다.아, 이런 임금이 없었다면 이런 신하도 없었을 것이요, 이런 신하가 없었다면 이런 공덕도 없었을 것이다. 이는 유비가 제갈량을 만난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고, 구름과 용이 서로 감응해서 만난 것처럼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법흥왕은 이미 없어졌던 터에 절을 세웠으며,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방포를 입었다. 궁중의 친척을 절의 종으로 삼고 그 절의 주지가 되어, 몸소 대중을 널리 교화시키는 일을 맡았다.진흥왕은 그 아버지의 덕을 이어받은 성인으로 왕위를 계승해 위엄으로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자 모두 순종하며 잘 따랐다. 이어 법흥왕이 머물렀던 흥륜사에 대왕흥륜사라는 편액을 내렸다.법흥왕의 성은 김씨이고, 출가한 뒤의 이름은 법운이며, 자는 법공이다. 책부원구에서는 성은 모, 이름은 진이라고 했다.왕이 처음 큰 공사를 시작하던 을묘년(535)에 왕비도 영흥사를 창건하면서, 첫 비구니 사씨의 유풍을 흠모해 왕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름을 묘법이라 하고, 또한 영흥사에 머물다가 몇 년 뒤에 죽었다.국사에는 건복 31년(614)에 영흥사의 소상이 저절로 부서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진흥 왕비 비구니가 죽었다고 하였다. 두 왕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한 사실을 역사서가 적지 않은 것은 세상을 이끌어가는 임금의 교훈이 아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또 대통 원년은 정미년(527)인데 법흥왕은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응천주에 절을 짓고 대통사라 이름하였다. 성스런 지혜는 만세의 큰일을 꾀하게 마련이나/ 구구한 입방아는 추호 같은 뜻을 기만할 뿐이다/ 법륜이 풀려 나와 금륜을 굴러가니/ 순임금 같은 시절 바야흐로 부처님의 시대로 높아지네// -원종 법흥왕에 대한 글이다.의에 죽고 생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 흰 젖 더욱 깊이 느껴지네/ 어느덧 한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 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염촉 이차돈에 대한 글이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법흥왕의 뜻을 이은 진흥왕법흥왕은 왕비를 여럿 두었지만 아들을 얻지 못했다. 서로 시샘한 왕비들의 투기로 아들이 태어날 기미만 보이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없애버렸다.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왕실에서부터 서서히 백성들에게 불교를 전파해 국가이념으로 삼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라를 경영하고 싶었다. 특히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중국으로부터도 독립한 당당한 나라로 서고자 했다.이를 위해 왕위를 물려받을 적자는 성골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해 왕족끼리 결혼을 추진했다. 왕은 자신의 딸을 동생과 결혼시켜 왕족, 성골의 신분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려 했다.아들이 없었던 법흥왕은 동생의 아들이자 딸의 아들인 삼맥종을 지극히 사랑해 아들처럼 곁에 두었다. 결국 조카 삼맥종을 태자로 삼았다. 왕의 뜻에 따라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충분히 펼 수 있는 어린 삼맥종을 진흥왕으로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법흥왕은 이사부와 거칠부의 세력에 밀려 자신이 세운 흥륜사에서 승복을 입고 주지가 되어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홍복을 빌다 입적했다.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10여 년을 보내며 나름대로 국정 운영에 대한 철학을 배웠다. 진흥왕은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강한 나라를 주장하며 연호를 개국이라 바꾸고 정복군주로 나섰다.이사부와 거칠부 장군을 앞세워 백제와의 전쟁을 통해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황초령, 마운령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특히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궁궐을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후궁 미실의 반대로 황룡사로 바꾸어 건설하고 백성들의 안위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 팔관회를 여는 등으로 불교 진흥정책에 힘을 썼다.진흥왕은 나라에서 엄격하게 제한했던 일반백성들도 공부하고 승려가 될 수 있게 했다. 원광법사 등의 이름 높은 승려가 배출되는 기반을 조성했다.진흥왕은 자신을 불교에서 훗날 사람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 미륵불과 함께 세상에 나타나 지배하는 전륜성왕이라 생각하고, 아들들의 이름도 동륜과 사륜으로 짓고 스스로 불교를 깊이 믿었다.아울러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 청소년들의 교육제도를 크게 활성화 시켰다. 화랑제도를 만들어 청년들이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동량으로 키우는 데 성공해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그러나 진흥왕은 후궁 미실의 사심이 가득한 전략에 밀려나는 운명을 맞았다. 미실이 진흥왕의 아들 태자 동륜과 정을 나누다 동륜이 다른 후궁에 눈을 돌리자 거칠부와 손을 잡고 제거했다. 이어 진지왕과 관계를 맺으며 왕비로 간택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진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그마저 제거하고, 다시 진흥왕의 손자였던 진평왕을 옹립했다.진흥왕은 죽은 태자 동륜을 위한 추도식을 전대 법흥왕이 입적했던 흥륜사에서 올리다가 미실과 거칠부의 계략에 의해 연금되어 궁궐로 돌아오지 못하고, 승복을 입고 흥륜사에서 생을 마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경주 남산 달빛기행 삼화령 애기부처와 동남산 할매부처

경주남산연구소가 지난 6일 역사문화도시 경주에서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 남산 달빛 기행을 주관했다.이날 달빛 기행은 신라 경덕왕이 건립했다는 월정교를 출발해 남산의 북쪽 끝단 도당산에 건립된 화백정을 거쳐 삼화령, 할매부처를 돌아오는 코스로 진행됐다.기행은 아직 밝은 기운이 남아 있는 오후 6시50분에 출발해 구름에 보름달이 가려져 어둑해진 산길을 더듬어 3시간이 지난 오후 10시께 마무리됐다.도당산은 경주 남산을 황금자라로 보았을 때 머리에 해당하는 북쪽에 위치해 월성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길지로 손꼽히던 곳이다.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은 달빛 기행 참가자들에게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토대로 곳곳의 문화유적에 대해 해설했다.어둠이 내린 남산의 화백정과 할매부처 앞에서 대금 명인 이성애 전수자가 대금으로 보름달 아래 친근한 음률로 참석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석장동 장근희(56)씨는 “문화답사라면 십여 년 째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지만 달빛 기행은 처음”이라며 “경주가 자랑하는 신라의 달밤 정취에 취하고, 변함없는 역사문화 유적의 구수한 이야기에 빠져든 시간이었다”면서 엄지 척 했다.김구석 소장은 “할매부처로 불리기도 하지만 달빛에 보면 선덕여왕으로도 보일 것”이라며 “할매부처는 신라 초기에 조성된 조각으로 불상으로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소개했다.경주남산연구소는 다음달 18일 늠비봉 5층 석탑으로 이어지는 달빛 기행을 계획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경주남산연구소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된다.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5) 신라 불교의 공인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수용할 때는 어떠한 계기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의 큰 발전을 가져온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도 그러한 절차가 있었다. 이차돈이 목숨을 바쳐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널리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열었다.삼국유사는 법흥왕을 원종, 이차돈을 염촉으로 기록하고 있다. 법흥왕이 불법(佛法)의 참됨을 이해하고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지만 토착신앙에 뿌리가 깊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왕의 마음을 헤아린 하급관리 이차돈이 불법의 전파를 위한 길을 제시했다. 목숨을 바친 이적으로 귀족들도 감복해 불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법흥왕의 불교 공인에 이어 신라에는 빠르게 불법이 확산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늦게 받아들였지만 국가적인 경영이념으로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퍼뜨려 결국 삼국통일을 이루는 상당한 힘이 됐다.이차돈의 희생은 나라를 크게 일으키고, 백성들의 마음에도 평화를 가져오는 큰 사랑의 불씨가 되었다.◆삼국유사: 원종은 불교를 일으키고 염촉은 몸을 바치다원화 연간(806~820)에 남간사의 승려 일념이 편찬한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신라 불교 공인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신라 법흥대왕 때이다. 궁궐 안을 잘 다스리며 해 뜨는 나라의 곳곳을 굽어 살피다가 옛날 한나라의 명제가 꿈을 꾸고 불교가 동쪽을 흘러들어온 일을 생각하고 “과인이 왕위에 오른 다음 백성들이 복을 닦고 죄를 없앨 곳을 만들고자 하였노라”고 말했다.그러나 신하들은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큰 뜻만을 지키고자 하고, 절을 짓겠다는 신령스런 대책에는 따르지 않았다.대왕이 탄식하며 “과인이 부덕하여 대업을 받들지 못하는구나. 위로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 뭇 백성들의 기쁨을 주지 못하네, 나라를 다스리는 바쁜 중에도 마음을 불교에 두었더니 누가 이 일을 도와주리오”라며 개탄했다.그때 남몰래 불도를 닦던 사람으로 성이 박이며 이름을 염촉이라 하는 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잘 모르겠으나 할아버지 아진 종은 곧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다. 대나무나 잣나무처럼 빼어난 바탕에다 맑은 거울 같은 뜻을 품었다.22세의 염촉이 왕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신이 듣기로는 옛 사람들은 나무꾼에게도 대책을 물었다 합니다. 외람되지만 죄를 무릅쓰고라도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며 뜻을 아뢰었다.“사인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고 왕이 말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림이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다함이 백성의 곧은 의리입니다. 그릇되게 말씀을 전했다 하여 신에게 목을 베는 형벌을 주시면 온 백성이 모두 복종하고 감히 명령을 어기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살을 베어 저울로 달아서라도 새 한 마리를 살릴 것이요, 피를 뿌려 목숨을 재촉할지라도 일곱 마리 짐승을 불쌍히 여길 것이다. 내 뜻이 남을 이롭게 하는데 있는 데 어찌 죄 없는 이를 죽이리요. 네가 비록 공덕을 쌓고자 하나 내가 죄를 피하는 게 낫다”고 듣지 않았다.“뭐라고 해도 제 목숨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실 것입니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왕은 “난새와 봉새의 새끼는 어려서도 하늘을 솟구칠 마음을 가지고, 기러기와 고니의 새끼는 나면서도 파도를 헤쳐나갈 기세를 품는다 했지. 네가 이와 같구나. 큰선비의 행실이라 할 만하다”라 칭찬하며 감복했다.이에 왕은 짐짓 위의를 갖추고 동서로는 풍도를, 남북으로는 상장을 벌려놓고,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 하는데 일부러 늦추려 하는가”라며 물었다.이에 여러 신하는 전전긍긍하며 수선스레 맹서하고 여기저기 손가락질만 하는 것이었다. 왕은 사인을 불러 나무랐다. 사인은 얼굴빛을 잃고 어떤 말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왕이 크게 화를 내며 목을 베라 명령을 하니, 형리가 묶어 관아 밖으로 나갔다. 사인이 맹서를 바치자 옥리가 목을 베는데,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하늘은 사방이 캄캄하게 빛을 잃어 어둡고 땅은 육방이 진동하며, 비처럼 내리는 꽃이 표표히 떨어졌다.왕은 슬픔에 겨워 비통한 눈물을 옷에 적시고, 대신들은 근심스러워 식은땀을 관복에 흘렸다. 달디 단 샘물이 홀연히 솟아나고, 물고기와 자라는 다투어 튀어 오르며, 곧은 나무는 먼저 꺾이고, 원숭이는 떼 지어 울었다.춘궁에서 일하던 동료는 피눈물을 흘리며 쳐다보기만 하고, 월정에서 같이 뛰놀던 친구들은 애끓듯 서러운 이별을 했다.관을 쳐다보며 우는소리가 마치 제 부모를 잃은 듯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개자추가 허벅지 살을 베었다 한들 이 엄청난 절개에는 비하지 못할 것이요, 홍연이 배를 갈랐다 한들 이 장렬함과는 견주지 못할 것이다. 이가 곧 임금의 믿음에 의지해 힘써 아도의 본 마음을 이룬 성자라고 했다.이어 북산의 서쪽 마루에 장사지냈다. 나인이 슬퍼하며 좋은 땅을 골라 절을 짓고 자추사라 했다. 이에 집집마다 예를 갖추어 대대로 영화를 지키고, 사람마다 도를 행해 불법의 이로움을 깨달았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이차돈의 결심이차돈은 원래 진골 출신의 왕족이다. 아버지가 궁궐에 일하였으나 청렴해 살림살이는 풍족하지 않았다. 차돈은 어려서부터 어질고 착해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글 읽기를 좋아해 일찍이 관복을 입었다.차돈이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꿈에 하얀 백조가 집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툇마루에 걸터앉아 마을 쪽을 향해 크게 날갯짓을 하는 태몽을 꾸었다. 그래서 큰 사람이 될 것으로 믿고 아무에게도 태몽을 이야기하지 않았다.한번은 이차돈이 서당에 갔다가 돌아오는 데 온 몸이 멍들고, 옷은 먼지를 덮어써 거지꼴이었다. 못된 왈패들이 서당의 친구를 괴롭히는 현장을 보고, 책을 던져놓고 친구를 끌어안고 뭇매를 맞았다.이렇듯 차돈은 심성이 착하고 의리가 좋아 친구들이 늘 옆에 붙어다녔다. 그러나 차돈은 공부하기를 좋아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에는 별 취미가 없었다.차돈은 글 읽기는 물론 무술 수업에도 착실하고 지혜로웠으며, 체격이 관운장을 닮은 장군 틀이었다.이차돈이 차분하게 글 읽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불법의 영향이 크다. 인도에서 당나라와 고구려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 유학승과의 우연한 만남에서부터 사상적으로 불교에 깊게 몰두했다.차돈이 벼슬에 나아가 공무를 보면서도 불교 서적을 읽는데 열중해 그는 이미 신라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진 땅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그가 스무 살 생일을 맞는 날 저녁, 집에서 성인식을 겸해 관부로 나아간 일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무르익어갈 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도인이 찾아왔다. 저녁상을 받은 도인이 차돈에게 부처가 그려진 비단 폭과 경전을 전해주며 불법에 대한 공부에 전념할 것을 주문하고는 연기처럼 사라졌다.그날부터 차돈은 부처님이 그려진 비단을 사당에 걸어두고 매일 경전을 읽으며 불도를 닦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면서 차돈은 부처님이 나타나 빙그레 웃으며 손짓하며 부르는 꿈을 여러 차례 꾸었다.왕이 불교를 널리 알리고 싶어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불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자신이 희생할 터이니 여러 신하가 보는 앞에서 본보기를 보이라고 수차례 설득했다. 차돈의 확고한 신념에 법흥왕도 진리를 실천하는 길이라 여기고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아끼는 신하 차돈의 목을 베자 우유 같은 피가 솟구치고, 천지가 진동하며 향기나는 꽃 비가 내렸다. 만 백성이 어버이가 돌아가신 듯 슬퍼하며, 한편으로 기뻐하며 찬양하고 불법을 믿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4) 칠처가람 (5·끝) 영묘사

신라는 전불시대에 이미 일곱 곳에 절이 있었다. 불국토로 발전할 인연이 있는 땅이었던 것이다. 불교와의 인연을 설명하는 칠처가람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어 전해진다.칠처가람은 황룡사, 분황사와 같이 지금도 크게 울림을 주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사천왕사는 천왕사로 기록되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지귀의 설화 등 이야기가 얽힌 사찰이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국립사찰로 이름이 전해져 유명하다.반면 영흥사와 담암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담암사는 오릉의 남쪽이라는 기록과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등의 흔적이 남아있지만 영흥사는 절터조차 분명하지 않다.◆영묘사영묘사는 신라 칠처가람 중 하나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 중 구나함불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했다.현재 흥륜사가 있는 곳이다. 이 절터에서 금당터를 비롯 금당 앞에 동서 대칭으로 있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영묘사(靈妙寺 또는 靈廟寺)라고 찍힌 기와가 출토되면서 지금의 흥륜사가 있는 곳이 영묘사 터로 밝혀졌다.영묘사의 터는 원래 큰 연못이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이 있다.영묘사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한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이 이 절에서 개구리가 3, 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의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채고 병사를 보내 소탕했다는 기록이 있다.영묘사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는 신라 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풍요라는 향가를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이것이 일할 때 일꾼들이 노래를 부르며 작업능률을 올리는 노동요의 시초였다고 한다.경덕왕 23년 764년에 영묘사의 장륙삼존불을 개금했다는 기록과 조선시대 세조 6년 1460년에 봉덕사의 신종을 이 절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묘사는 조선 초기까지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담암사담암사는 담엄사(曇嚴寺)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전불 칠처가람 가운데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청전(壻請田)에 있었던 사찰로 전해진다. 절은 신문왕 때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청전은 사위를 맞아들인 밭이라는 뜻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경주 오릉 남쪽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창건된 이후 고려 중기까지 7대 사찰의 하나로 중시되어 오다가 차차 퇴락해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담엄사지에는 삼층석탑 1기와 당간지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담엄사지 중앙을 관통하는 길을 내면서 절터는 거의 파괴되고 흔적을 찾기 어려워졌다.당간지주와 초석 등의 남은 석재들은 박혁거세의 제전인 숭덕전을 건립하면서 홍살문과 기초 석 등으로 사용했다. 파손된 탑의 팔부신중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당간지주 1기는 오릉 내부의 숲에 방치되어 있다.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농경지와 오릉 주차장 부지로 변했으나 신라시대 육부촌 시절에는 이곳에 알영양산촌이 있었다고 전한다.◆영흥사영흥사는 신라시대 칠처가람 중의 하나로 경주시 황남동에 있었던 절이라 전한다.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시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이다.기록으로는 세 하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사학자들은 지금의 서천변 야구장 일대를 영흥사지로 본다.신라 법흥왕 22년 535년 법흥왕의 비 파도부인이 영흥사를 창건했다. 2년 뒤 법흥왕이 왕위를 물리고 출가하자 파도부인도 법명을 묘법이라 하고 이 절에 출가해 머물렀다.진흥왕 33년 572년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부인도 법명을 묘주라 하고는 역시 영흥사에 출가했다.신문왕 4년 684년에 이 절을 관리하는 성전을 설치했다. 경덕왕 18년 759년에 감영흥사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지귀의 사랑진평왕 말기에 서라벌 장터에 노리개를 팔아 노모를 봉양하는 훤칠하게 잘 생긴 청년이 살았다.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느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집과 일터를 오가며 땅만 살피는 사람이라 하여 지귀라는 별명이 붙었다.봄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오후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는데 지귀의 점포에 곱게 단장한 아가씨 둘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봄처녀들은 솜사탕을 손에 들고 제비처럼 조잘되며 지귀 점포의 노리개를 요리조리 살폈다.지귀는 손님들의 시중을 곧잘 들며 비위를 잘 맞춰 웬만한 손님은 모두 뭐라도 하나쯤 사들고 가도록 하는 장사의 신이다. 그런 지귀의 상술은 장터에 이미 쫙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로 그의 입은 잠시도 쉬는 법이 없다. 손님이 들면 손님의 비위를 맞추거나 날씨 타령, 허접한 이웃 부부의 싸움 이야기라도 늘어놓는다. 손님이 없을 때는 노래로 흥을 돋우며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그런데 봄비 내리는 그날 운명처럼 찾아온 두 여인의 모습에 지귀는 그만 넋을 놓아버렸다. 말 한마디 못하고 아가씨들이 노리개를 들고 재잘대는 모습을 바라보느라 가격을 묻는 손님의 말도 듣지 못했다.“이거 얼마예요” 방울 노리개와 토끼모양 머리핀을 하나씩 들고 지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쫑알거리는 두 아가씨의 추궁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지귀가 더듬더듬 횡설수설했다.묘령의 두 여인은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여행을 즐기는 진평왕의 공주 선덕과 시녀 만주였다. 지귀의 모습에 재미를 느낀 시녀 만주가 넌지시 장난을 걸었다. “우리 아씨 예쁘지요”라며 눈을 찡긋하자 홍당무가 된 지귀가 더욱 안절부절못하며 노리개를 포장하는 손을 심하게 떨었다.지귀는 선덕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도 설쳤다. 이튿날부터 장터에 나온 지귀는 혹여 그 처녀들이 나타날까 두리번거리느라 말을 잊었다. 그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선덕과 만주는 지귀의 노리개를 사가는 단골이 되었다. 지귀는 어느새 마음속 깊이 선덕을 앉히고 매번 그가 만든 노리개를 선물로 준비해 건네곤 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지귀는 그만의 체취가 묻어나는 독특한 인형들을 만들었다. 지귀가 나무를 깎아 만든 동물인형들은 익살스럽기도 하고 앙증맞은 표정으로 살아있는 것 같아 선덕도 매우 좋아했다.선덕이 자신이 만든 인형을 받아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지귀는 행복에 겨워 밤을 낮 삼아 인형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귀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진평왕의 죽음으로 맏딸이었던 선덕여왕은 왕위를 이어받아 장례와 국정을 살피는 바쁜 일정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갈 수가 없었다.선덕여왕이 즉위 1년을 맞아 진평왕릉으로 인사차 하는 나들이 행렬을 바라보다 지귀는 까무러치게 놀라버렸다. 자신이 밤낮으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여인이 왕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시녀 만주도 번쩍이는 비단옷을 입고 여왕의 곁에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선덕여왕은 즉위 3주년을 맞아 영묘사로 제를 올리러 가면서 만주를 통해 지귀에게 아버지를 닮은 실물크기의 인형을 주문했다. 그 이후 지귀가 깎은 나무인형들은 아무에게도 전달되지 않은 채 영묘사 법당에 하나씩 쌓여갔다. 마침내 지귀는 법당을 가득 채운 인형을 끌어안고 행복한 꿈을 꾸다 심화가 일으킨 화재로 한 줌의 재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